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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TUE

NO KITCHEN FOR WOMAN

여자 없는 주방

레스토랑 주방에도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여자는 손이 더워 스시를 만들 수 없다.” 2003년 개봉한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가 미도(강혜정)를 처음 만나 한 말이다. 미도는 극중 한국 최연소 여자 일식 요리사로 등장한다. 영화가 관객몰이를 하고 이목을 집중시킨 탓일까. 여자가 생리학적 이유로 스시를 쥘 수 없다는 생각은 공공연한 사실처럼 퍼졌다. 실제로 스시 카운터에 여자가 선 모습이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더 공고해졌을 터. 남정아 씨는 지난 10년간 이런 편견과 싸우며 스시를 쥔 여성 일식 요리사 중 한 명이다. “스시 카운터에 있는 저를 보고 열에 아홉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어요. 대놓고 얕잡아 보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손님도 많았죠. ‘스시 카운터에 왜 여자가 있어?’ ‘여자가 해봤자…’ 등 차별 섞인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일본 유학을 앞둔 정아 씨가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부산에서 8년가량 경력을 쌓은 후 서울로 올라와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었는데, 대체로 신입 월급을 제시했어요. 어떤 곳은 ‘홀에서 일하면 10만원 올려주겠다’고도 했죠.” 여태껏 쌓은 경력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 부당함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정아 씨는 끝내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스시 전문점 ‘스시초희’에 입사했다. 정아 씨의 남편이자 일식 요리사인 김태한 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아내 말고도 여성 요리사와 함께 일한 경험이 몇 차례 있어요. 대부분 비슷한 경력의 남자 요리사보다 실력이 뛰어났어요. 여자들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에서 버텼다는 건 정신력이나 실력 모두 뛰어나다는 사실을 의미해요. 그럼에도 여자는 무조건 뽑지 않으려는 분위기 때문에 하나같이 일을 구하기 힘들어했어요.” 일식 주방에서 여자를 채용하지 않는 이유로 내세우는 남녀의 체온 차이는 정말 타당한 걸까. 부부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남편보다 제가 몸이 더 차요. 그리고 핵심은 스시가 단순히 차갑게 즐기는 음식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너무 차면 오히려 맛을 느끼지 못해요. 실제로 스시집에 가면 실온에 꺼내놓은 생선을 많이 보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주방에 여자를 들이지 않기 위한 핑계 같아요.” 정아 씨의 설명이다. 그동안 권위 있는 일식 요리사들은 자신의 주방에 여성이 없는 이유로 배란이 시작되면 황체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체온이 1℃ 오른다는 매우 그럴싸한 논리를 내놓았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체온이 일시적으로 1℃ 오른다고 생선이 상하거나 초밥의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또 얼음물이나 찬물에 적신 수건을 활용해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 편견에 가까운 이런 생각은 초밥 문화가 태동한 일본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보다 더 보수적인 일본은 여성의 주방 진출을 극도로 경계한다. 자국의 식문화에서 가장 높은 차원에 해당하는 초밥 세계는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미슐랭 가이드> 3성 셰프인 오노 지로는 다큐멘터리 영화 <스시 장인: 지로의 꿈>을 통해 국내에도 꽤 알려진 스시 장인이다. 미국에서 제작한 이 영화가 담은 숭고한 장인 정신은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전했는데, 당시 영화만큼 화제가 된 게 있었다. 오노 지로의 큰아들이 <월 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 성차별적 언사였다. 영화를 본 기자가 주방에 여자가 부재한 이유를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미각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성은 생리적 주기로 인해 그 감각이 불균형을 이룹니다. 때문에 여성은 스시 요리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남성 중심의 주방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은 비단 아시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계 미국인 셰프 니키 나카야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이세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넷플릭스의 유명 요리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이 조명하기도 한 그녀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남성들의 차별적 시선이나 편견과 싸운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카야마의 여성 동료는 “셰프가 여자라는 이유로 레스토랑을 나간 손님들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나카야마는 손님들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하게끔 주방 문을 걸어 잠갔다.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말이다. 남성 셰프들이 오픈 키친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 달리 극과 극의 선택을 한 것이다. 나카야마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셰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계이고, 일본에 뿌리를 둔 요리를 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인 시선이 따라붙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방 내 성차별은 거의 모든 국가의 레스토랑에서 일어난다. 그 강도는 레스토랑이 전통성과 격식을 중시하는 파인다이닝일수록 더 심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가정에서 부엌일은 여성의 몫으로 여기면서 레스토랑 주방은 남성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실태가. <여성 셰프 분투기>(현실문화)의 저자 데버러 A. 해리스와 패티 주프리는 셰프를 다룬 미디어 자료 2206개를 분석하고 여성 셰프 33명을 심층 인터뷰해 여성이 주방에서 성차별을 받는 사회적 배경을 도출해 냈다. 요리사는 오랜 시간 동안 하인 계급에 속했다. 수세기에 거쳐 특출한 인물들이 노력한 결과, 현재 요리사는 전문직을 넘어 슈퍼스타로 극적 신분 상승을 이뤘다. 그 과정은 참으로 힘들고 지난했다. 사람들이 요리를 단순노동으로 여겼으며, 보수를 받지 않는 가정 노동과 다를 게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통성과 전문성을 스스로 강조하고 증명하기 위해 가정 요리와 끝없이 선 긋기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가정 요리를 담당하는 여성을 부정하고 배제했다. “호텔 실습을 나가면 저 같은 남학생에게는 힘든 일을, 여학생들에게는 쉬운 일을 주는 게 차별 대우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실습 과정을 끝내고 정식 채용할 때가 되니 여학생들은 채용 대상에서 모두 배제됐어요. 여성을 동료로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죠.”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무오키’의 오너 셰프 박무현 씨의 말이다. “SNS를 통해 요리를 배우는 학생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줬어요. 여학생들의 고민 중 상당수가 성차별이나 성폭력과 관련돼 있었죠.” 무현 씨는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 중 남성 중심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요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애석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예 교수가 수업 시간에 여학생들을 가리키며 ‘너희들은 요리 안 할 거 아냐. 어차피 못 버틸 거 배워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는데, 같은 남자이자 업계 사람으로서 정말 수용할 수 없는 태도였어요.” 현재 요리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성비는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실제로 레스토랑에 취직하거나 경력을 쌓아 높은 위치에 오른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낮다. 레스토랑에서는 그 이유로 여성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점을 들고, 이를 약한 체력과 감정적 성향 탓으로 단정 짓는다. “요즘 요리를 배우는 젊은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레스토랑을 자주 옮겨 다니며 다양한 주방과 셰프를 경험하는 거예요. 한 주방에 오래 있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비단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무현 씨의 말이다. 여성에게 동등한 대우 속에서 실력에 따라 승진하여 셰프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을 비춰준다면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만큼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CREDIT

에디터 김영재
작가 이주연
일러스트 HALE ADAM
디자인 황동미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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