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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7. SAT

Politics is the New Black

유행을 믿지 말자

지금 페미니즘은 본질에 집중하고 있는가?



유행을 믿지 말자 

Jessa Crispin(<북슬럿> 전 편집장) 


내가 젊은 페미니스트였던 1990년대, 낙태법 철회를 외치는 여성들의 분노를 표현한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티셔츠를 댈러스 거리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요즘은 SNS로 자신의 신념을 손쉽게 알릴 수 있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에겐 티셔츠와 부츠, 헤어스타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적힌 디올 티셔츠가 710달러, 지난 1월에 진행된 여성권리 행진에 수많은 여성들이 착용했던 미쏘니 니트 푸시 해트가 190달러를 호가한다. 이 아이템들이 과연 순수하게 정치적 의식을 일깨우고 여성의 결속을 다지는 것일까? 그저 구매를 부채질하려는 전략은 아닐까? 과거, 패션과 페미니즘은 경쟁 관계였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몸을 매혹적으로 만들려는 디자인은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두고 칼 라거펠트는 2009년에 한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적 편견을 역설적으로 비꼬는 발언을 했다. 그는 그를 코코 샤넬로 가정한 후 ‘당신은 1920년에 여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페미니스트인가요?’라는 질문에 독설로 답했다. “저는 페미니스트였던 적이 없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될 만큼 못생기지 않았거든요.” 그랬던 그가 2015 S/S 피날레 무대에서 피켓을 든 모델들을 내세운 시위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역사는 그녀의 스토리다(History is Her Story)’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모델들은 경쾌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 새로운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칼 라거펠트를 필두로 패션과 페미니즘이 껴안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디자이너들은 페미니즘 슬로건이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프라발 구룽은 2017 F/W 피날레에서 39개의 슬로건 티셔츠를 선보였는데, 여기에 적힌 메시지는 페미니즘적인 것을 포함해 산아제한에 의한 가족계획, ACLU(미국시민자유연맹), 구룽의 모국인 네팔의 2015년 지진피해 돕기 등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브랜드가 판매수익금을 재단에 기부하는 것이나 페미니즘 구호를 내세웠다는 점이 아니다. 고가의 티셔츠 판매와 수익금의 일부의 환원 뒤에 숨어 있는 판매전략에 의구심이 들 뿐이다. 기금 모금은 티셔츠 판매가 아니더라도 다른 활동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시인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앤 보이어(Anne Boyer)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뉴 인콰이어리>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질병과 싸우는 여성들을 접하면서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깨달았다. 그녀들은 질병과 싸우면서 여성혐오와 의학계의 불합리한 수익구조, 고통과 죽음에 분포된 여성 차별과 맞서 싸워야 했다.” 유방암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일깨움’이 아니라 구조적인 개혁이다. 왜 흑인 여성의 보험료가 더 비싸고 치료 과정에서 차별을 당해야 하는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적’은 이중적이다. 진짜 문제점을 외면하고 겉으로 보이는 활동에만 치중하는 것이다. 마케팅이 대중적인 확산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인정한다. 연예인들의 자선활동이나 브랜드의 기부금 모금 효과를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본질적인 것인가? 진정한 권익 보호를 위해 얼마나 할애하고 있을까? 페미니즘이 패셔너블해질 수 있다는 건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그다지 패셔너블하지 않았던 시절보다 본질에 집중하고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페미니즘이 패셔너블해지기 위해 브랜드 공장에서 최저생계비로 일하는 여성의 임금은 어떤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은 그저 슬로건이 아니다. 브랜드가 선의를 갖고 있는지, 판매전략을 통해 트렌드에만 일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CREDIT

글 JESSA CRISPIN
사진 IMAXTREE.COM
에디터 이혜미
번역 권태경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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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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