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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MON

SORRY, NOT SORRY

약속 펑크 시대

약속을 잡는 것도 취소하는 것도 너무 쉬운 시대. 우리는 자신의 게으름을 대면하기로 한 걸까? 혹시 미안하다는 감정이 뭔지 잊은 건 아닐까?

우리는 약속을 기꺼이 잡으면서도 막상 약속 당일이 되면 피로감에 시달린다. 다행히도 방법은 있다. 바로 상대에게 솔직해지는 것!



‘그럼 한남동에서 만나요?’ ‘전 어디든 좋아요~’ ‘나 그쪽은 잘 모르는데…’ 또다! 이 단톡방은 약속 장소를 한번 정하려면 최소 반나절이 걸린다. 배려라는 명목 하에 서로 결정을 미루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근본적인 의구심이 솟구친다. 우리는 과연 진짜 만나고 싶긴 한 걸까? ‘한남동 맛집' 링크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던 찰나,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우리 토요일에 보는 거 맞지?’ 아 맞다. 맞아 맞는데요… 이럴 수가. 그게 이번 주말이었나? 2주 전 약속을 잡을 때만 해도 우리 집까지 오겠다는 친구 말에 잔뜩 들떠 동네 맛집 리스트까지 찾아둘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벌써 목요일이고, 나는 친구를 집에서 맞이할 여유가 없다. 다행히 좋은 핑계가 있다. ‘나 몸이 안 좋아서 어제 링거 맞고 정신 차렸어. 주말에 출근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쩌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인데도 죄책감이 든다. 결국 ‘조만간’ 내가 너희 동네로 가겠노라고 만회하는 약속을 잡는다. 친구와 우리 집의 거리는 지하철 정거장 기준으로 25개. 좀 멀긴 하지만 시간만 있다면 못 갈 거리도 아니지 뭐. 그 ‘조만간’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첩을 넘기며 통화 중인 한 남자가 “아니야, 목요일은 안돼. ‘네버(영원히 안 보는 것)’ 어때? ‘네버’ 괜찮아?”라고 말하는 유명한 만평은 1993년, <더 뉴요커> 잡지에 실렸다. 시간이 더 흐르고 흐른 지금은 그야말로 ‘약속 펑크’ 시대다. 너무나 쉽게 실시간으로 연락할 수 있는 현대 기술 덕분에 날짜까지 잡은 약속도 ‘그냥 밥 한번 먹자’는 소리와 크게 다를 바 없게 됐다.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2000여 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들은 1인당 1년에 104개의 약속을 잡은 뒤, 그중 절반은 취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어번 딕셔너리는 이제 ‘Flaking’을 막판에 약속을 깨버리는 행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정의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모임이나 자리를 벗어나는 행위를 가리키는 ‘Bailing’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약속을 취소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당연히 문제다! 약속은 상대방이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잠재적으로 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을 포기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버튼만 누르면 끝나는 ‘예약 취소’처럼 아무도 마음 상하지 않는 불참 선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송승언 시인은 자신의 SNS에 소모임에서의 ‘노 쇼(No Show)’가 얼마나 주최 측에게 무력감을 선사하는지 설명하는 글을 남겼다. ‘작은 모임과 행사는 대부분 같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렇기에 노 쇼로 생기는 빈 공간은 더 크게 느껴진다. 자신의 사정에 따라 우선 순위 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안 하는 게 맞다’는 내용이다.


그럼 우리는 왜 이렇게 응석 부리듯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걸까. 런던의 심리학자 애비게일 산 박사의 진단은 꽤 믿을 만하다. “디지털 수단을 통해 교류하는 게 일상이 되다 보니 실제로 만나 감정을 교류하는 게 불안한 거죠.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려 들거든요. 그래서 약속을 취소하면 일시적인 안도감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약속을 거리낌 없이 잡으면서도 막상 약속 전날이나 당일이 되면 불안과 피로감에 시달린다. 퇴근길을 뚫고 약속장소에 도착해 저녁을 먹은 뒤, 카페에 갔다가 헤어지게 될까? 혹시 2차, 3차까지 달릴 생각은 아닐까? 술에 취한 친구가 회사 욕을 하며 날 붙잡고 놔주지 않거나 예상보다 많은 돈을 쓰게 되는 건 아닐는지.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예측 불가능한 요소 투성이다. 그에 비해 조용히 귀가 후 집에서 보내게 될 나만의 시간은 얼마나 예상 가능하고 편안한가. 집에 오자마자 브래지어를 풀어 던지고 유튜브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저녁이 될 수도 있는데!
일방적이고 변덕스러운 약속 취소는 오늘 해결해야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는 습관과 다름없다. 그러나 모든 약속을 다 지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달라지는 컨디션, 시시각각 발생하는 상황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약속을 잘 깨는 방법이 있다는 애비게일 박사의 말은 위로가 된다.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는 게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상대방이 당신이 약속에 나타나지 않은 진짜 이유에 대해 어림짐작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약속을 깨기 위한 괜찮은 핑곗거리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한 적은 없는지. 혹은 ‘우리 그날 보는 거 맞지?’ 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상대방이 약속을 먼저 저버리기를 바란 적은 없는지 말이다. 좀 더 솔직해 볼까? 짧은 메시지와 이모티콘으로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해서, 우리는 모든 약속을 공평하게 취소하지는 않는다. 주말의 반나절을 할애해야 하는(심지어 드레스업한 상태로!) 결혼식은 현대인에게 가장 난이도 높은 약속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도 결혼식에 갑자기 불참을 선언하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경조사 참석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가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 같은 모임, ‘선배’나 ‘어르신’들이 나오는 모임의 참석도 쉽게 빠지지 않는다. 반면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과의 약속은 종종 더 쉽게, 더 자주 취소되거나 만남을 직전에 앞두고 변경된다. ‘갑자기 회식한대 ㅠㅠ’ ‘몸이 안 좋네’ 같은 뻔한 변명과 핑계에도 이유를 묻지 않고 넘어가줄 사람들이니까. 넘쳐나는 약속 때문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직접 만날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게 바로 우리가 약속을 취소할 때 솔직해져야 하는 이유다.


만약 내가 약속을 없애는 대신 ‘저녁에는 시간이 되는데 집을 못 치워서 네가 우리 동네까지 오는 건 미안하다’고 사정을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나와 친구는 서로의 집 중간쯤 되는 곳에서 만나 쌓인 수다를 떨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기약 없는 약속을 잡는 대신 말이다. 무조건 청첩장을 받기보다 ‘참석은 어려울 것 같다’고 일찌감치 말할 용기가 있다면, 수많은 결혼식 대신 남자친구와 여행으로 주말을 보낼 수도 있을 테고.
메시지와 SNS로 쉽게 만남을 잡고 취소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사정과 기분을 솔직하게, 조금 더 일찍 설명하는 데 그 기능을 사용할 수도 있다. 거절 의사를 미리 전하고 싶다는 이유로 말할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 ‘진짜’ 내 사정을 털어놓는 게 100배 낫지 않을까? 최소한 서로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할 수 있는 관계라면 말이다. 좋아, 일단 내일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우리 성수동 00에서 보기로 했잖아. 그런데 나는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은 ‘인스타 성지’에서 금요일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거든. 다른 데서 보는 건 어때?’ 어때. 불만과 피로감을 안고 만나는 것보다 좀 더 나은 방법 아닐까? 물론 친구가 그 레스토랑에 꼭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면 기꺼이 따를 생각이다. 예를 들어 셰프가 정말 훈남이라든지!

CREDIT

에디터 이마루
일러스트레이터 RATCLIFFE JO
디자인 이효진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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