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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0. FRI

THE WOMAN AND THE CAR

좋은 차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힘으로


20년 전쯤 운전면허를 따서 10년 넘게 운전자로 살고 있다. 심지어 자전거 타기도 30대가 돼서 배운 나에게는 2족보행 외에 가장 오래 익혀 익숙해진 자력 이동 방식이 운전인 셈이다. 첫 차는 2008년식 기아 뉴 모닝 SLX였고, 지금 몰고 있는 두 번째 차는 2011년식 미니 쿠퍼 컨버터블 모델이다. 돌이켜보면 이 두 대의 차량과 함께한 운전의 역사가 곧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경험의 응축이었다. 이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비싼 금액의 물건을 구입하는 ‘인생 지름’에 장기 할부의 책임이 따라왔다. 차량관리의 매 단계에서는 내가 지금 이 구역의 ‘호갱’은 아닌가 고민했으며, 예기치 못한 사고로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 다른 사람과의 분쟁에 맞닥뜨려도 봤다. 자동차와 운전이라니, 사사건건 맨스플레인을 겪기 딱 좋은 분야이기도 했다. 유독 남자들은 내 차를 보면 우리나라 날씨에 컨버터블 뚜껑 열 날이 얼마나 되겠냐는 이야기를 했다(제가 그걸 모를까요?). 대중교통에서 사적인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 오는 타인의 무례함에서 도망친 대신 도로 위에서 더 크고 위험한 난폭함을 겪었으며 그 틈에서 품위와 박애주의를 잃지 않으려 애쓰느라 매일 고단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하지만 큰 번거로움에 큰 재미가 따르는 일이다. 내 소유의 자동차는 새로운 페스티벌의 입장 팔찌 같았으며 운전자에게 서울은 다른 시공간을 열어주었다. 논현동 24시간 카페의 테라스에서 여름 새벽 커피를 마실 때, 가을 단풍을 보느라 남산순환도로를 멀리 돌아갈 때, 밤의 강변북로에서 속도를 높일 때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속속들이 사랑하게 됐다. 넓어진 활동 반경, 언제든 혼자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로운 감각은 스스로 강해진 느낌을 주기도 했다. 강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지나친 나머지 광명 이케아가 처음 생겼을 때도 거기까지 기어이 혼자 가서는 차 뚜껑을 열고 수납장 조립 세트를 꽂아 넣은 채(뒷자리에 싣고서는 도저히 문이 닫히지 않았다) 매연을 헤치며 서부간선도로를 달려온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차는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혼자 앉아 사색할 수 있는 1인석을 내줬다. 혼자 모는 차는 혼자 사는 집과 다르게 생활에서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다. 갑갑하게 정체돼 있던 여러 고민도 운전대를 잡으면 신기하게 도로 위를 따라 흘러 움직였다. 이 모든 이야기를 약간은 아련하게 과거형으로 쓰는 건 내가 최근 직장을 옮기면서 마을버스 통근자가 됐기 때문이다. 주말에 가끔 미니의 동그란 스마트 키를 꽂아 넣고 야무진 엔진 시동 소리를 들으며 떠올린다. 강남까지 매일 2시간의 출퇴근 운전생활을 내가 얼마나 사랑하고 또 지긋지긋해 했는지, 그 오랜 양가 감정을.

마흔이 되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세 번째 차를 사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다. 윤기가 흐르는 까만색 포드 머스탱. 잊고 있었던 로망이 되살아난 건 얼마 전 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서 핫펠트 예은을 보면서다. “머스탱을 샀을 때 ‘여자들이 타는 차가 아닌데’ 하는 소리를 가장 많이 들었어요.”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을 만나고 싶었다며 강원도의 서킷을 찾아간 예은이 트랙을 질주할 때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30대 언젠가의 나는 대담하고 직선적인 라인을 가진 크고 다부진 머슬 카에 끌렸고, 마흔(당시로선 까마득한 나이 같던) 즈음에 그런 차를 몰면 멋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여자들이 잘 타는 차가 아니니까 하는 마음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럼 여자들이 타는 차는 어떤 걸까? 승차감이 안락하고 부드러운 세단? 운전석이 높아 시야가 확보되는 SUV? 스파크에서 내놓았던 코럴 핑크 같은 외장 컬러? 40대의 인생도 드라마틱한 변화 없이 지속된다는 걸 알지만, 그때보다 운전에도 인생에도 조금 더 능숙해진 지금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이렇다. ‘남자들이 타는 차만큼이나 다양하다.’ 주차를 도와주는 파일럿 기능이라든가, 차를 세운 다음 시동을 꺼도 30초 정도 유지되는 헤드램프 등 여성 운전자를 콕 집어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들이 홍보하는 특장점에 대해 솔깃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저것들은 운전이 서투르거나 더 편하게 차를 몰고 싶은 모든 운전자에게 혜택이 될 기능이며, 그 대상이 반드시 여성 운전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머지않은 미래의 세 번째 차를 떠올려보는 건 요즘의 즐거운 공상인데, 그사이 내 취향은 머스탱에서 확실히 멀어졌다. 귀여운 컬러와 테일램프의 지프 레니게이드,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인 짐니, 유려한 곡선의 아우디 A7과 콤팩트한 해치백 디자인의 벤츠 45AMG도 가슴을 뛰게 한다.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골랐던 첫 차보다 본능에 끌려 한 번의 시승에 반해 덜컥 계약한 두 번째 차를 더 만족하며 오래 타고 있으니 인생은 모르는 법이다. 40대 후반 그리고 아직은 멀어 보이는 50대에 나는 어떤 차를 원하고 또 선택하게 될까? 더 크고 더 비싼 차라면 도로 위에서 나를 ‘김여사’로 깎아내릴 준비가 된 무례한 운전자들로부터 갑옷처럼 지켜줄까? 분명한 건 자동차가 현대인에게 움직이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점이다. 좋은 차는 여자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힘으로.

CREDIT

글 황선우(젠틀몬스터 브랜딩본부)
사진 GETTYIMAGESKOREA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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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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