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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WED

SWEET LIKE HONEY

신의 꿀방울

지금부터 마법처럼 황홀하고 달콤한 꿀로 만든 술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북유럽 신화는 허무맹랑하면서도 사람을 끄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 그 신화에서 벌꿀 술은 언제나 사건의 중심에 있다. 북유럽 신화에서 최고 신에 해당하는 오딘의 사연만 봐도 그렇다. 영화 <토르>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토르의 아버지가 바로 오딘이다.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오딘의 외모 중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척안이라는 사실. 그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늘 창모자나 머리쓰개가 딸린 망토를 둘러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한쪽 눈을 잃게 된 이유가 바로 벌꿀 술 때문이다. 미지의 지식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인족 세계에 잠입한 오딘은 지혜와 현명함을 불어넣는다는 지혜의 샘물을 한 모금 마시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했다. 이때 지혜의 샘물이 바로 벌꿀 술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크 엘프들이 존경받던 신 크바시르를 죽여 그의 피로 벌꿀 술을 담그자 그 술에 크바시르의 모든 지식이 용해돼 이를 마시는 자는 현자, 특히 뛰어난 시인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오딘은 이 술을 손에 넣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썼고, 여러 목숨을 희생시킨 후에 뜻을 이뤘다. 동명의 영화로 개봉해 우리에게 익숙한 <베어울프>는 영국인이 성문한, 북유럽 최고의 고대 영웅 서사시다. <베어울프>에서 압권으로 손꼽히는 부분은 베어울프가 그렌델이라는 괴수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덴마크 왕 로스가르의 궁전 가까이에 살던 그렌델은 밤이면 연회장에서 새어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웃음 소리에 화가 나 인간을 잡아먹었다. 술 취한 백성과 전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자 왕이 괴수를 처단하기 위해 베어울프를 부르는데, 이때 등장하는 문제의 연회장 이름이 바로 ‘미드 홀(Mead Hall)’이다. ‘Mead’가 영어로 벌꿀 술을 뜻하니 이를 한글로 옮기면 ‘벌꿀 술 회관’쯤 되겠다. 실제로 영화에는 베어울프가 왕을 첫 대면한 장면에서 “당신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었소. 당신의 유명한 벌꿀 술도 마시고 싶구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외에도 <왕좌의 게임> 원작 소설인 조지 R. 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에도 벌꿀 술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벌꿀 술을 인류 최초의 알코올 음료로 추정한다. 물론 기원전 4000년경에 맥주를 빚었다는 기록을 두고 맥주가 더 앞섰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Mead’가 그리스어와 산스크리트어에 어원을 둔, ‘음주’나 ‘몹시 취함’을 의미하는 가장 오래된 단어라는 사실을 근거로 벌꿀 술이 석기시대부터 음용됐을 거라는 주장이 어원 학자를 중심으로 더 큰 지지를 받는다. 알코올은 엄밀히 말해 당분 중에서도 단당류가 발효 과정을 거쳐 생성된다. 이때 꿀이 와인과 맥주의 주재료인 포도와 보리보다 더 쉽게 당화된다. 영양소의 70% 이상이 이미 단당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떤 물리적 노력 없이 쉬이 술로 변하는 꿀의 특성을 두고 학자들은 이렇게 추론한다. 사냥을 나간 혈거 부족민이 목을 축이기 위해 땅에 떨어진 벌집에 고인 빗물을 마셨는데, 그 물이 벌집에 있던 꿀과 공기 중에 떠도는 효모군에 의해 발효됐을 거라고. 이는 지극히 우연한 발견이지만, 최초로 취기를 느낀 인류가 비슷한 시도를 하며 벌꿀 술이 발전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대서사시 같은 이야기를 듣자니 벌꿀 술이 무척 진묘하게 다가온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닌 벌꿀 술이 공룡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훨씬 더 값싸게 구할 수 있는 포도로 술을 담그기 시작하면서 대중에게 외면받은 데다 설상가상 16세기의 종교개혁을 거치며 교회에서 양초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수입이 시원찮은 양봉업자들이 벌꿀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포도가 자라지 않는 영국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겨우 맥이 이어진 벌꿀 술이 최근 미식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에 있는 소규모 양조장을 중심으로 인 크래프트 맥주 붐이 전 세계에 퍼지며 사람들은 다양한 향신료와 공법을 활용하여 개성 있고 독특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더욱 다양한 풍미를 이끌어내려는 양조업자들의 갈망은 사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 사이더(Cider)와 벌꿀 술이라는 전통 술로 회귀하는 현상을 낳았다. 특히 이 둘은 글루텐이 없어 서양에서 많이 발견되는 셀리악병 보유자들에게 맥주의 대안으로 환영받는다. 현재 미국에는 크래프트 벌꿀 술을 개발, 판매하는 양조장의 수가 300개에 달하며, 맥주나 와인 양조장에서도 벌꿀 술을 라인업에 하나씩 추가하는 추세다.


국내에도 벌꿀 술을 빚는 소규모 양조장이 드문드문 생기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단연 ‘곰세마리양조장’이다. 우선 세련된 디자인으로 국내에서도 꽤 인기를 끈 영국 고스넬스 양조장의 벌꿀 술처럼 라벨부터 눈길을 끈다. 백지에 금박으로 글씨와 그림을 새겨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양조장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곰 일러스트레이션이 귀엽기까지 하다. 제품도 ‘어린꿀술’ ‘오리지널’ ‘스위트’로 세분화해서 출시했는데, 이는 국내 양조장 중에서 유일한 성과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친구가 벌꿀 술을 빚었다고 권했을 때는 맛이 영 별로였어요. 김 빠진 술 같았다고 할까요? 그러다 그 친구가 몇 년 후 양조장을 차리고 건네준 술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은하수를 퍼서 마시는 기분이었어요.” 곰세마리양조장 양유미 대표의 말이다. 양 대표는 곰세마리양조장 창시자인 유용곤 대표와 10년 지기로, 1년 전 양조장 처분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당시 뜻을 함께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와중에도 양 대표가 고집을 꺾지 않은 이유는 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저희 술을 ‘어떤 풍경이 떠오르는 맛’이라고 해요. 제 입장에서도 꽃과 풀, 흐르는 물이 있는 풍경이 떠오르고요. 매우 서정적이고 깨끗하며, 굉장히 자연스러운 맛과 향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곰세마리의 술은 벌꿀 술 중에서 알코올 도수가 9.5~11.3%로 꽤 높은 편이다. 화이트 와인과 비등한 알코올 도수를 낼 수 있는 원동력은 단순하다. 꿀을 아낌없이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곰세마리 벌꿀 술은 36%의 꿀과 64%의 물, 0.1%의 효모로 이뤄진다. 물론 발효가 끝나고 나면 효모가 남지 않기 때문에 계산이 맞다. 비교하는 대상에 따라 꿀 함유량이 곱절에 가깝다. 당을 보충하거나 착향료는 물론 이산화황 등의 보존제도 넣지 않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맛이 더 놀랍다. 꿀 함량이 높은 만큼 꿀처럼 입에 척 들러붙고 혀가 찌르르 할 만큼 달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특히 오리지널은 꿀보다 사과, 포도 등의 과실향이 먼저 떠올랐다. 실제 맛도 단맛만큼 신맛이 나고, 떫은맛까지 지녀 벌꿀 술이라고 귀띔하지 않으면 꿀내 나는 와인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스위트는 단맛이 나는 술을 기피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살구와 풋사과 같은 화사한 향에 기분 좋은 산미가 단맛과 어우러지면서 훌륭한 밸런스를 갖춰 잇따라 들이켜고 말았다. 이쯤 되니 어린꿀술의 풍미가 몹시도 궁금하다. 오리지널, 스위트와 어린꿀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의 두 술이 6개월, 후자가 2개월로 숙성 기간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양조장에서 저희끼리 갓 발효가 끝난, 여과하지 않은 술을 마시는데 그게 또 굉장히 매력 있어요. 그래서 한 차례만 여과해서 2개월 동안 숙성한 어린꿀술을 개발했어요. 어린꿀술에서는 잘린 풀과 흰 꽃 내음이 나면서 맑게 딱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여성적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여과와 숙성을 거듭할수록 점점 깊은 계곡에 들어가는 느낌이 나요. 젖은 풀과 나무 냄새가 나면서 풍미가 농밀해지죠.” 와인 잔에 채운 벌꿀 술에 코를 대고 양 대표 말을 경청하자니, VR 헤드셋을 끼고 양지 바른 초원에서 계곡을 따라 산을 거슬러올라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이끼 가득한 숲을 짧게 다녀온 착각이 들었다. “꿀은 검정색 같아요. 제각각 진한 향들이 한데 뭉쳐져 오히려 하나의 향처럼 느껴지는데, 술이 되는 과정에서 이들 향이 형성한 레이어가 하나씩 펼쳐져 보여요.”


그렇다. 꿀은 벌이 꽃의 꿀샘에서 단물을 채취하여 먹이로 저장해 둔, 자연이 자연을 스스로 가공한 결과물이다. 꿀에서 꽃, 풀, 나무, 과일 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단지 꿀의 압도적 단맛에 그 향들이 가려져 있었을 뿐. “와인이나 싱글몰트 위스키처럼 가끔 술이 계급 지표로 여겨지는 것 같아 불편해요. 반면 벌꿀 술은 얼마나 쉽고 직관적이에요. 주재료인 꿀도 청계산 일대에서 작업하는 양봉업자한테 받으니 설명할 때 부르고뉴까지 갈 필요도 없고 얼마나 쉬워요. 앞으로도 저희 성격처럼 단순하지만 깨끗하고 자연스러운 맛을 추구하고 싶어요.” 곰세마리양조장은 제품을 계절에 맞게 추가 개발할 예정이다. 양 대표는 봄을 위해 준비 중인 벚꽃꿀술은 좀 더 상큼한 과실 향이 난다고 전했다. 하지만 출시 시점이 올봄이 될지, 내년 봄일지는 아직 미정이다. 순간 어릴 적 할머니가 두 손 가득 따주던 버찌의 황홀하면서 우아한 신맛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가오는 봄날에 벚꽃꿀술을 맛볼 수 있기를 조용히 바랐다.

CREDIT

글 이주연
에디터 김영재
사진 우창원
디자인 오주희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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