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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6. FRI

WILL BE ALRIGHT

2등은 오답이 아냐

순위를 매기는 버릇을 가진 사회에서 2등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처참하고 안쓰러운 단어다. 실은 2등은 그런 취급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제왕의 무대였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김연아의 무대에 대해서라면 여왕이라거나 여신이라거나 하는 성별에 국한하는 단어로는 표현이 안 된다고 믿고 있다. 동계 스포츠 불모지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세계 정상의 자리에 몇 번이나 올랐던 김연아는 은퇴를 번복하고 소치로 향했다. 후배들에게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늘 그래왔듯이 누구보다 빙판 위에서 가장 자유롭게, 홀가분한 무대를 펼친 김연아의 기록은 2등이었다. 은메달. 금메달을 딴 러시아의 소트니코바마저 받아들이는 게 어색해 보였던 이날의 2등은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2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을 진짜 2등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연아의 은메달이 실질적인 1등, 곧 인정할 수 없는 2등이기 때문에 이 순간을 곱씹어 기억하려는 것은 아닐까. 2등 그 자체로 많은 이의 기억에 남은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살리에리가 떠오른다. 천재 모차르트에게 가려진 영원한 이인자,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는 수많은 일인자와 이인자 이야기의 모티프가 됐다. 살리에리처럼 기억되지 않는 2등, 언제나 재능에 무릎 꿇고 그걸 넘어서지 못하는 2등에 대한 서사는 꾸준히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천재이거나 즐기는 존재로서의 1등이 존재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2등이 1등을 넘어서는 서사는 이야기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2등은 언제나 1등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야 안심이 되고, 언젠가 1등이 될 가능성이 없다면 결국 잊히고 마는 비운의 존재인 것이다. 특히 등수를 매기는 스포츠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승리하는 데 있지 않고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는” 올림픽 정신은 분명 숭고하지만 그 빛이 바랜 지는 오래다. 무엇보다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를 두지 않는 한국 문화에서 2등인 은메달이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금메달을 기대했던 결승전이나 최종전의 패배는 늘 ‘은메달에 그쳤다’거나 ‘은메달에 머물렀다’로 표현되곤 한다. 숫자로 등수를 매기지 않는 분야라 하더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예술은 결국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않는 것의 싸움이다. 기억되는 것만이 1등이고, 그 외에는 결국 2등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1등이 되어야 하고, 또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나는 노력, 1등이 되기 위해서라면 지독한 연습이나 학대에 가까운 교육까지도 눈감아주곤 하는 한국에서 영화 <위플래쉬>에서 제자를 혹독하게 몰아치는 방식으로 예술적 영감을 끌어내려 했던 플레처 교수가 훌륭한 스승의 표본인 것처럼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2등이라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기만인지도 모른다.



금메달이 아니라면 세계 2위인데도 슬퍼하는 사회에 살면서 2등이면 어떠냐는 말은 속 편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 1등일 수는 없잖아? 언제까지 1등이 되기 위해 달려가야만 해? 이런 질문이 떠나지 않는다면 정답은 아닐지라도 힌트를 찾을 수 있는 두 영화가 있다. 3월 개봉을 앞둔 마고 로비 주연의 <아이, 토냐>는 1위에 대한 집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미국 피겨스케이터인 토냐 하딩의 실화를 그린 영화는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낸시 캐리건 피습 사건을 다뤘다. 토냐는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한 스케이터다. 만 3세 때 이미 빙판에서 자유자재로 춤추었고, 오래도록 1등 자리에 있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토냐는 4등에 그쳐 메달을 따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다시금 자신을 다잡으며 원래 위치로 돌아갔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랬더라면 그의 이야기가 영화화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출전 선수 결정전을 앞두고 토냐의 라이벌이었던 낸시 캐리건이 괴한에 의해 피습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사건의 주모자가 토냐의 전남편과 경호원으로 밝혀지면서 미국은 이 범죄에 토냐가 연루됐는가를 놓고 여론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영화는 사건의 전모보다 토냐를 1위로 만들고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비극의 시작점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정지우 감독의 2015년 작 <4등>이 있다.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는 소년 준호는 대회에만 나가면 2등도 아니고 4등을 한다. 자신의 욕망을 오직 자녀에게만 투사하는 엄마에게 준호의 등수를 높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다. 준호 엄마의 부탁으로 준호를 가르치게 된 수영 강사 광수는 소년의 몸이 시퍼렇게 멍들 때까지 때리며 기록을 올리게 만든다. 그건 바로 과거의 자신이 수영을 배우고, 싫어하게 된 방식이다. 이 조용하게 깊은 영화는 스포츠라는 종목에서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1등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1등은 지극한 고통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건 비단 스포츠나 예술 분야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일을, 공부를, 삶에서 과제로 여겨지는 것들을 1등으로 통과하기 위해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가면서도 1등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을 얻으면 그 고통이 다 씻겨나갈 것으로 믿고 있는 건 아닐까? 흥미롭게도 <아이, 토냐>와 <4등>의 결말은 반대다. 이건 실화와 픽션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4등>의 준호처럼 1등을 하고 나서야 1등이라는 결과가 실은 즐겁게, 나만의 방식으로 해나가다가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삶의 태도를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보았다. 중국의 여자 수영 선수인 푸위안후이는 자신이 동메달을 땄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크게 놀라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어 “내일의 결과도 기대하나요?”라는 리포터의 질문에 “아뇨, 지금에 너무나 만족해요”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1등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결국 2등이라도 꼴찌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삶의 태도도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자신을 알고, 자신의 최선에 행복해 하는 것. 비교하지 않는 것. 당장 평창 동계올림픽부터 ‘아쉬운 은메달’ 같은 표현을 쓰지 말고 선수들이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이 되기를 응원하면서. 그때서야 비로소 ‘2등이라도 괜찮을 수 있다’는 말을 꺼내볼 수 있을 것이다.



윤이나 작가. 책 <미쓰윤의 알바일지>, JTBC 웹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람>을 썼다.


CREDIT

글 윤이나
에디터 김영재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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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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