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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SUN

TODAY IS

365개의 숫자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여배우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 그 시절 우리가 바라본 달력의 위상이다


‘달력 인심 실종’ 이 말은 놀랍게도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 속에서 뉴스 헤드라인에 빈번히 등장했다. 세밑이면 공중파 3사의 뉴스 앵커들은 자못 진지한 투로 이 세 단어를 읊었다. 연말마다 일반 회사와 금융사가 달력을 무료로 나눠주곤 했는데, 벽마다 걸고도 남아 장롱 위에 묵힐 정도로 후했던 달력 인심이 경기침체로 인해 박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야박해진 달력 인심에 분개하면서도 한 권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엄동설한에 은행 앞에 줄을 섰다. 지금 생각하면 한낱 달력에 뭘 그리 집착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 철 지난 달력은 아이들에게 스케치북, 어른에게는 윷놀이 말판이자 갓 부쳐낸 전 아래 까는 기름 종이 등 그 쓰임새가 다양했다. 이렇듯 생활 면면이 활용된 달력 특히, 성인 남성 등짝만한 벽걸이 달력이 점차 사라진 배경에는 급변한 생활상이 담겨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3대가 한 집에 모여 사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러고도 방이 남으면 시골에 사는 먼 친척 혹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안면부지의 남에게 사글세를 받고 방을 내줬다.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기억할 터. 당시 집들은 가족 단위가 컸던 만큼 면적이 넓고 방이 많은 구조였다. 현시점으로 보면 엄연히 독립된 가족 구성에 해당하는 개인과 부부, 부모와 자녀가 하나씩 차지한 방마다 달력이 걸려 있었다. 대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크게 설계된 거실과 부엌에는 시선 닿는 곳마다 달력을 두어 개씩 걸어 두었다. 그 후로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가족 단위는 드라마틱하게 줄어들었고 덩달아 집의 규모도 확연하게 작아졌다. 큰 평수 아파트의 인기가 시들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니 벽걸이 달력을 걸 만한 공간이 없으며, 드물게 있더라도 그 자리는 달력 대신 사진이나 미술 작품이 차지한다. 무엇보다 활자로 새겨진 숫자를 보는 일이 드물다. 손에 항상 쥐고 다니는 휴대전화를 몇 번 터치하면 코앞에 달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때 달력은 경기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연말이면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은 경제지표와 각 기업의 자금 사정을 점치기 위해 용하다는 점집 대신 을지로 인쇄 골목으로 향했다. 올해 기업이 달력에 투자하는 비용과 총생산량이 내년 경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즉, 기업들이 달력을 많이 제작한다는 것은 현재까지 축적한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 실적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내포했다. 그리하여 ‘불경기에는 달력 인심도 마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돌기도 했다.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던 달력이 대중적 기물로 확산된 시기는 1950년대였다. 당시의 달력은 매우 뜻밖의 용도로 활용됐다.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용 선물로 제작해 배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 한 장으로 이뤄진 달력의 정중앙에 정치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고, 이를 열두 달에 해당하는 숫자판이 빙 둘렀다. 사람들은 좋든 싫든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한 정치인의 낯짝을 일 년 열두 달 봐야 했다. 당시 선거 유세용 달력과 함께 인기를 끈 달력은 한 장에 하루를 담은 일력이었다. 이는 총 365장으로 이뤄진 일력의 얇은 종이가 화장실 휴지로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수준의 이야기다.





1960년대 컬러 인쇄의 시대가 열리며 달력은 장식품으로서 기능을 강화했다. 2030세대가 자신들의 우상을 브로마이드나 책받침으로 간직했다면 5060세대는 달력으로 기억한다. 팬들에게 귀한 굿즈였던 ‘연예인 카렌다’는 연예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몸값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금액에 달력 모델로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을지로에서 만난 최창혁 선생의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국내 최대 규모의 달력 전문 제작사 홍일문화인쇄에서 25년간 일한 최 선생은 달력의 부침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 “여배우들은 달력 촬영할 때마다 꼭 자신을 1월에 실어야 한다며 집요하게 요구했어요.” 최 선생이 회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대개 달력을 12월에 받잖아요. 그럼 진작부터 첫 장을 펼쳐 놓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 너도나도 1월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기를 바랐어요. 또 몸매에 자신 있는 여배우들은 여름에 해당하는 달에 실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죠. 당시 달력은 여배우의 인기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였어요.” 실제로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달력에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불리던 문희, 남정임, 윤정희, 70년대 ‘2대 트로이카’로 불리던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 80년대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 황신혜, 금보라 등이 대표 인물이다.


오랜 시간 여배우 일색이던 달력 사진은 차차 남자 배우 혹은 커플, 가족 컨셉트의 사진으로 다양해졌다. 선호하는 의상도 한복에서 양장, 수영복 순으로 변했다. “수영복 사진은 열두 달 중 여름에 해당하는 달에만 등장했는데, 반응이 뜨겁자 아예 모든 사진을 수영복 차림으로 찍는 방향으로 흘러갔어요. 여배우들이 수영복 화보를 부담스러워해 달력 주인공도 배우에서 탤런트, 섹시 모델로 변해갔죠.” 최 선생의 기억으로는 연예인 캘린더가 198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엘르>를 필두로 패션 잡지가 국내에서 대거 창간되면서 더 이상 연예인 화보로서 달력이 갖는 가치가 무의미해진 것이다. 연예인 캘린더가 시들한 틈을 타 인기를 끈 것이 미술 작품을 실은 달력이었다. 지금처럼 갤러리가 많지 않고 전시가 드물었던 시절에는 달력이 미술 작품을 보고 소유하는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대중의 심리를 헤아린 달력 제작자들은 당대 최고로 칭송받는 화가를 섭외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작가들이 연예인과 또 다른 차원으로 대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 과정이 매우 지난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점묘법으로 전원 풍경을 그린 이대원 화백의 작품으로 달력을 제작했을 때 노령의 선생이 투병 중이어서 매일같이 병원으로 교정지를 나르고는 했습니다. 민병갑 선생의 작품은 반응이 좋아 여러 번 함께 작업했는데, 어찌나 성격이 대쪽 같은지 합의를 이끌어내기 쉽지 않았어요. 달력은 장식품인 만큼 인쇄 과정에서 작품의 명도 등을 조금씩 조정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냥 네가 그려라’며 교정지를 집어던지곤 했어요. 운보 김기창 선생은 제가 몇 차례나 찾아갔으나 끝내 거절하더라고요.” 당시 운보 작품의 판권료는 서울 종로구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고 한다.


연예인 화보, 동양화, 서양화에서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며 해외 풍경 사진이 인기몰이를 한 달력은 IMF를 겪으며 실종 위기를 겪었다. 그 시대를 관통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을 안겼다. 그 사이 휴대전화가 보급되고 1인 가구가 증가하는 등 생활상이 급변하며 달력의 위상도 변했다. 연말이면 달력을 여러 권씩 구해달라는 부모님의 닦달도 점점 수그러들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는 시대에 달력은 더 이상 생활필수품이 아니다. 벽걸이보다 조그마한 탁상 달력을 선호하며 그 또한 공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디자인의 달력 제품을 선호한다. 나는 2018년을 준비하며 달력 두 권을 마련했다. 하나는 디자인 브랜드 ‘테스트테스트(Testest)’의 일력, 또 하나는 향수 브랜드 수향(Soohyang)의 베이커리 달력이다. 전자는 노트처럼 책으로 엮은 일력으로 각 장에 그날의 날짜에 해당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총 400쪽에 달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360° 제본 방식을 택하여 펼쳐서 기록하기에 용이하다. 또 날짜에 해당하는 숫자가 크게 새겨져 있어 메모를 매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롭다. 무엇보다 휘리릭 넘기는 순간순간 휴일을 나타내는 핑크빛 숫자들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열두 장의 빵 사진으로 이뤄진 수향 베이커리 달력은 사진 속 빵이 눈앞에 실존하는 듯 문지르면 공간 가득 고소한 단내를 풍긴다. 분위기는 물론 공간의 공기마저 달콤하게 환기시킨다. 세월의 순서 역할을 하는 달력이 시간과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 오브제로서 그 가치를 갖추기 시작했다.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지만 달력이 우리 일상에서 퇴출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CREDIT

글 이주연
에디터 김영재
사진 김재민
디자인 전근영
패브릭 달력은 DEPOUND 제품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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