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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WED

THINK PINK

'핑크' 받지 못한 자

무채색만 입고 살아온 에디터가 핑크 컬러 옷을 입고 일주일을 돌아다녔다


후디드 스웨트셔츠는 가격 미정, Vetements by 10 Corso Como Seoul.



오죽이나 핑크와 나 사이가 데면데면했으면 이런 칼럼이 다른 사람 머리에서 나왔을까 싶다. 여태껏 핑크 아이템이라곤 가져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내가 핑크색 옷을 입고 난 소감을 칼럼으로 쓰자고 했다. 적어도 내겐 ‘트라이애슬론 도전기’ 혹은 ‘한 달간 밀가루 끊기’보다 혹독한 거다. 그렇게 핑크라는 색이 내게 왔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내게 핑크색 옷을 입히지 않았다. 앨범을 뒤적거려 보니 파란색이나 흰색 정도면 무난할 봄 소풍에 무려 고동색, 그것도 굳이 음지에서 서식하는 버섯이 그려진 바지를 입혀 보냈다. 엄마는 내게 소녀처럼 행동하고, 조신하게 처신하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컸나? 고동색 버섯 바지를 입었던 날부터 오늘까지 핑크로 뭉뚱그려진, ‘샤라라랄라랄라’ 효과음이 깔리는 소녀 취향의 색을 피해온 것 같다. 핑크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옷과 함께 입어야 한다는 거부감이 무거웠나 보다. 핑크라는 이름의 여자에겐 나이도 있다. 어린 여자애와 핑크 블러셔의 조합은 감당할 필요 없는 싱그러움이지만, 중년 여자에게 핑크 블러셔는 손쓸 수 없는 촌스러움 혹은 술 취한 모습이 되곤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핑크를 입으려면 빨강이나 보라보다 더 용기가 필요하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색 대신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매일 다른 옷을 입건 아무도 내가 옷을 바꿔 입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컬러가 내겐 최고였다. 


어쨌든 나는 칼럼을 빌미로 핑크색 옷을 ‘사러’ 갔다. 한 벌도 없었기 때문에. 베이비 핑크는 차마 손대지 못했고, 팥죽색이 섞인 핑크 옷을 입고 피팅 룸 거울을 보니 등산부원 같았다. 약간 물이 빠진 듯한 페일 핑크 티셔츠를 골라 입고 나섰다. 반응은 좋았다. “어, 너, 오늘…?” 최소한 비난하거나 놀려대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반응을 예상했으나, 그보다 앞서 찾아온 것은 스스로의 변화다. 핑크색 옷에 걸맞은 상큼함을 내 표정에, 내 컨디션에 장착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다. 덕분에 누구에게 보여주기보다 자신에게 밝은 하루를 내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좋은 순간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뚱뚱해 보였다. 내가 여자답게 보이기는 거부했으나 내가 못나 보이는 건 여전히 싫었다. 단지 색깔 하나 피한다고 해서 미처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적 굴레는 생각보다 많았다. 미국의 자존감 컨설턴트인 메간 램지(Meaghan Ramsey)는 TED 강연에서 “자기 몸과 이미지에 대한 자존감이 낮을 경우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와 “미국 내 여학생 중 상당수가 자신의 외모에 이목이 쏠리는 게 싫어서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예시를 들어 ‘내가 못생겼나’라는 질문을 굳이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도, 자신이 못 입는 스타일이나 컬러가 있다고 한정할 필요도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주목받음으로써 피곤해질, 난감해질, 쑥스러워질 상황은 물론 심지어 칭찬받을 상황마저 애써 사양해 온 여자들아, 스파이더맨도 아니면서 자신을 숨기고 살기로 결심할 필요는 없다. 


핑크를 입음으로써 혹은 거부함으로써,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너무 용감했다. 그럼에도 이번 경험을 통해 전보다 핑크색 옷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내게 찾아온 변화는 생각보다 고요하면서도 따뜻했고, 내가 핑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 테러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대적인 핑크 스타일링을 선언하겠단 소린 아니고. 당분간 양말 정도? 모든 변화는 서서히 꾀해야 탈이 없다니까. 

CREDIT

EDITOR 이경은
PHOTOGRAPHER 이수현
DIGITAL DESIGNER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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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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