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라이프 > 데이트 가이드

2018.12.01. SAT

MEN OF DECEMBER

12월의 밤은 낮보다 뜨겁다

본능적이었던 만남, 아찔했던 연애, 더없이 섹시했던 그 남자들. 그리고 그들은 달력의 마지막 장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계절이 아니라 연말을 탄다. 벚꽃은 분명 예쁘지만 여의도까지 보러 가는 건 너무 귀찮으니 패스, 요즘 가을은 겨울이나 다름없이 춥다고 툴툴거리는 게 전부지만 연말이 되면 나도 모르게 미니드레스나 스틸레토 힐을 들여다보게 된다. 평소라면 저런 스팽글 디자인은 과하다고 여길 테지만 어쩐지 마음이 동한다. 전등으로 치장한 가로수와 크리스마스 쇼윈도가 반짝거리며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삽입곡 ‘All you need is love’가 환청처럼 들리는데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나? 그래, 난 지금 사랑이 필요하다! 사실 매년 외롭다고 칭얼대면서도 외로운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2월은 1년 중 카톡 알림이 가장 바쁘게 울려대고 구글 캘린더가 술자리와 파티로 빼곡하게 채워지는 시기다. 싱글 성인 남녀의 80%가 작정하고 밤거리를 헤매는 시즌.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오죽하면 12월 24일 오후 9시부터 25일 오전 3시까지, 이 시간을 두고 전 세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남녀가 가장 많다는 의미로 ‘Sex’s Six Hour’라 할까. 실제로 임신 주기 관리 사이트 킨다라(Kindara) 조사에 따르면 가장 섹스를 많이 하는 시기는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연말에 이르는 1주일이라고. 이를 뒷받침하듯 영국의 한 조산사는 크리스마스로부터 9개월이 지난 9~10월이 되면 비상식적일 정도로 바빠진다면서 “부디 크리스마스에 섹스를 하지 말아 달라”는 트윗을 남겼다. 사실 이런 자료가 무슨 필요가 있겠나. 그냥 우리의 지난 연말을 돌아보면 되는데.


나 역시 남자친구가 없을 때는 남자들과 숱한 밤을 보냈다. 일 때문에 만난 사람과 “해 가기 전에 한번 봬요”라는 인사치레가 현실이 되어 술잔을 기울이다가, 오랜 친구들과 송년회를 가지다가 친구의 친구가 합석하는 바람에, 여자 친구들과 한껏 차려입고 클럽이라도 갔다가 생판 모르는 남과 어쩌다가…. 데이팅 앱 틴더가 세상에 등장한 이후엔 그게 더 쉬워졌다. 평소보다 메시지에 적극적이고 자극적으로 답하게 됐다. 학생일 때는 방학이었고 직장인이 된 이후에는 회사 역시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열흘에 가까운 휴가를 기꺼이 내줬다.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좀 풀어지고 놀라고 팍팍 밀어주는 셈인데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사실 문제라고 할 것도 없지만) 우연히 만난 그들 대부분이 우연히 사라졌다는 거다. 12월의 연애 규칙은 이랬다. 진도는 빨리 빼더라도 관계의 단계는 천천히 밟을 것. 단순한 원 나이트는 아무리 12월일지라도 별 재미가 없었다. 섹스를 위한 섹스만큼 공허한 것도 없으니까(그래, 투 나이트면 몰라도). 그렇다고 분위기에 휩쓸려 만난 누군가와 덜컥 연인이 될 정도로 순진한 타입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데이트도 적당히 하면서 섹스도 즐기지만 서로 의무나 책임 질 필요가 없는 편(리)한 관계를 선호해 왔다는 얘기다. 어느 겨울에는 남자 4명과 데이트 반, 섹스 반 같은 관계를 동시에 가진 적도 있다. 누군가는 독점적 관계로 발전하길 원했고 다른 누구는 섹스 후엔 차갑게 식었다. 나는? 좀 바빴고 많이 헷갈렸다. 이 얘기를 A에게 했던가? 지난주에 함께 파스타를 먹은 게 B였나, 아님 C였나? 메시지를 잘못 보내진 않을까? 그런 건 둘째치고 크리스마스이브엔 누구를 만나야 하나? 보신각 종소리는 누구와 듣지? 아니, 무엇보다 우리가 그런 시간을 함께 보낼 사이이긴 하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가 바뀌자마자 한 달을 못 가고 남자들의 숫자는 반으로 줄었고 달력이 한 장 더 넘어가기 전에 그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연말, 나는 4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두 남자와 또 그런 데이트를 했고 새해를 맞으며 다시 이별했다.



연말마다 찾아오는 진지한 연애와 원 나이트 사이 어디쯤의 다소 허무한 관계는 글로벌적인 이슈다. 외국인 친구 F는 연말엔 ‘오피스 섹스’가 정석이라고 털어놓았다. “핼러윈데이, 크리스마스, 새해 파티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냥 한두 달 내내 취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잖아. 평소 상상만 해왔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거지. 겨우살이 나뭇가지 아래에서 키스하는 풍습 같은 걸 핑계로 해도 좋고.”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오피스 섹스까지는 아니지만 10여 년간 알고 지냈던 K와 모텔에서 보낸 지독하게 추웠던 12월의 어느 밤이 떠올랐다. 새벽 4시쯤 한 침대에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다가 술이 깰 때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집으로 향했던 것 같다. “엄마가 빨리 들어오래”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누가 믿겠느냐마는, 그도 달리 캐묻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길고 안정된 연애를 이어오고 있는 D는 다소 모험적인 일화를 들려줬다. “10년째 같은 사람하고 비슷한 패턴으로 섹스하는 거 좀 지겹잖아.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이브레이터를 주고 롤 플레이를 해봤어.” 실제 구글에 ‘크리스마스’를 검색하면 ‘크리스마스 섹스’가 연관 검색어로 등장하고 커플을 위한 크리스마스 베스트 섹스 가이드가 줄을 잇는다. 식용 가능한 커피 맛 윤활제를 응용하라거나(그 후에 솔티드 캐러멜 시럽을 허벅지에 바르면 그게 바로 캐러멜 마키아토가 된단다. 제법 창의적이다), 초콜릿을 사용하거나(뻔하다), 샤워 부스처럼 장소에 변화를 주라는(‘The Steam Press’라는 특정 체위를 추천했으니 궁금하다면 검색해 보길) 식이다. 결국 요지는 연말 밤을 보다 뜨겁고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건 싱글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다. 어쩌면 이건 인간미이고 본능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나. 난 어떻게 그토록 용감할 수 있었나. 굳이 핑계를 찾자면 12월이 가진 판타지의 동력은 다름 아닌 술이다. 음주가 일종의 전희이고 연애의 결정적 도화선 중 하나라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다. 미국 <공중보건저널>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30%가 어느 정도 술에 취하기 전에는 섹슈얼한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고 답했다 한다. 다시 말해 술을 마시면 자연히 마음이 열리고 몸도 열린다는 소리다. 만화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캐릭터이자 갱스터 중 하나인 호머 심슨도 이런 건배사를 남기지 않았던가. “인생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인 알코올을 위하여!” 그러니까 그냥 올해도 술이나 좀 마시면서 연말을 보내야겠다. 어차피 1월이면 다 끝날 얘기니까.

CREDIT

글 김희민
에디너 김영재
아트 온세미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2월호
참고하세요!

저작권법에 의거, 엘르온라인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타 홈페이지와 타 블로그 및 게시판 등에 불법 게재시 불이익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