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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WED

INBETWEEN #9

이별 없는 연애도 있을까?

만나고 헤어지는, 그 평범하고 지루한 시간 너머에는 혹시 사랑이 있을까? 그때,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해질 수 있을까?



세상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무너져 내렸다. 아침에 있어났더니 잔뜩 흐려있는 하늘, 갑자기 받은 메시지의 무심함, 지나가는 누군가의 불쾌한 시선이 하루를 정의해버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날이었다. 우리는 어제 헤어진 참이었다. 지나가면 복원될 일도, 무슨 감기처럼 회복될 일도 아니었다. 이미 발사된 총알, 무참히 깨진 그릇이었다.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제 경험으로 알았다. 눈을 뜨면 혼자서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몸이 무거운 아침이었다.
술은 일시적인 위안도 아니었다. 마주 앉은 친구가 회복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마음이 괴로울 땐 대화만으로도 풀릴 수 있다고? 말은 엉뚱한 사람 사이에서 흩어졌다가 곧 사라졌다.
"연애가 다 그렇지", "더 좋은 사람 만날거야".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지만 어떤 말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는 거라서, 차라리 침묵이 나은 때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다 털고 일어나야 하는 새벽, 이 한 마디는 남아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애썼어."
왜 그렇게 애를 썼던 걸까? 어떤 이별은 꼭 그 사람의 양감만큼 스산했다. 만나면 안을 수 있었던 상체, 잡을 수 있었던 손의 부피만큼 내 몸이 사라진 것 같았다. 혹은 잃어버린 미래였다. 둘이 했던 약속, 미처 말도 못했던 바람들까지 애꿎게 버려진 참이었다. 그땐 그게 영원한 상실 같았다. 열흘쯤 지나면 천천히 아물어갈 거라는 것, 볼 때마다 울컥하던 손편지를 다소 명랑한 마음으로 다시 읽게 될 날이 올거라는 사실도 그땐 몰랐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나있던 사이였다는 것도 다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도 애를 썼다. 왜 그랬을까?
관계에선 익숙함이 제일 무섭다. 둘의 언어가 닮아가고, 한 사람만 알던 노래를 기쁘게 공유하고, 같이 부르고, 함께 지낸 밤의 숫자가 커진다는 건 결국 우리도 모르게 일상이 포개진다는 뜻이었다. 처음엔 마법 같았다. 권하면 응했다. 청하면 들어주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타기 하듯 지내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렇게 특별했던 사람도 결국은 평범해졌다. 모조리 빛나던 시간도 곧 지루해졌다. 시작할 땐 온통 새로웠던 표정도 무슨 의미없는 배경처럼 흐릿해지게 마련이었다. 연애와 일상의 매혹이자 함정이었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권태가 가까워지는 걸 눈을 부릅뜨고 지켜 봤다. 인생의 진짜 쾌락은 권태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고 믿는 사람의 사랑은 그때부터 힘을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어지는 시간은 멀어지는 대로 두는 것, 시시각각 관계를 정의하는 일, 혹은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 마음 속에 연애 이후의 관계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애를 썼던 이유였다. 그 다음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고있어도 보고싶은 연애의 낭만은 이미 끝나있었다. 우리는 조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믿고 싶었다. 우리가 보낸 시간에 거짓은 없었다는 걸. 그 밍밍한 시간이야말로 연애의 정수 같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그 밋밋함에서 좌초했다. 작은 거짓들이 쌓여 거대한 배신이 되었다. 그런 채 남아있는 슬픔만이 연애의 반작용, 허무의 근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냉정하게 묻고 싶었다. 우리는 그때 정말 특별했던 걸까? 이별은 서로를 보통명사로 만들어버리는 흑마술같은 거였을까? 올 가을 패션처럼 만났다가 다음 시즌엔 자연스럽게 헤어질 준비를 하는 이런 때? 모두가 연애하고 수시로 헤어지는 시대, 우리는 서로의 연애 상대였을 때야말로 흔하디 흔한 보통명사 아니었을까? 헤어지고 나면 그저 연애였다. 그렇게 아팠어도 평범하고 허무한 낭만이었다. 달콤한 타협안, 그 정도의 인연. 사실 우리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다. 연애가 평범했다 생각하니 이별도 하찮아졌다.
며칠이나 지났지? 혹은 몇 주?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마침내 아침이 가벼워졌을 때, 다시 모든게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우리는 어디까지 함께일 수 있을까? 낭만 이후의 낭만, 판타지 이후의 판타지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여전히 무수한 물음표 사이에서,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대화를 다만 사려 깊은 표정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좋지만, 우리도 곧 시들해지겠죠?"
"그렇겠죠? 아마도."
"하지만 너무 좋아해. 너무."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 담백하고 예쁜 표정, 처음 듣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는 영원히 대화하고 싶었다.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렇게 시작된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예측조차 못하는 채. 하지만 같이 보내는 시간만큼 명백한 게 또 있을까? 곧 지칠 거라는 허무, 이토록 빛나는 마음도 곧 사그라들 거라는 냉소의 복판에서 서로가 기꺼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그 안에서 진심으로 찾고 싶은 게 있었다.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수순, 달콤하지만 평범한 연애의 모든 과정 이후를 상상하면서. 언젠가 서로에게 조금 더 특별해지기 위해서.



CREDIT

에디터 김은정
글 정우성
사진 영화 <청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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