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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TUE

IN BETWEEN #8

보고 싶은 사람, 잊혀진 얼굴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거기 그대로 있었는데


천천히 회상할 때, 배경을 다시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고택은 혼자라면 절대 안 갔을 지역에 있었다. 거기서 맞은 아침은 여름이었는데도 서늘했다.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다. 그때 덮었던 이불의 무게와 질감, 습기 하나 없이 보송보송했던 피부, 밤새 방안에 가득 찬 숨 냄새 같은 것들. 잘 차린 아침 식사로 유명한 고택이었는데, 우리는 늦잠에서 막 깬 참이었다. 염치없지만 늦은 아침 식사를 부탁드린다고 말하러 나갈 때 마루 바닥에선 ‘삐그덕’ 소리가 났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식어갈 때의 서늘함, 환절기 같은 우울, 독하고 지긋지긋한 감기 같았던 안녕. 그 역시 또렷했다.

헤어질 때의 모든 감정은 극단적으로 낯설었다. 한 번도 안 냈던 화를 냈다. 상대를 밀어낼 땐 무슨 돌부처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 울어서 지쳐 잠들거나 걸려오는 전화를 외면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액자처럼 걸려있는 방이 내 마음 속엔 있었다. 자주 들어가는 방은 아니지만, 그 방에 놓여있는 것들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그랬는지, 그래서 얼마나 잔인하게 아팠는지도. 그렇게 선명하니까, 그 방들은 아주 무거운 문으로 닫아 놓았다. 거대한 자물쇠도 몇 개나 채워놓았다. 물론 들어가고 싶을 땐 유령처럼 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은 방이라도, 결국엔 내 마음이니까.


이렇게 모든 배경이 선명한데 얼굴만은 희미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얼굴인데도 떠올릴 때마다 그랬다. 얼굴만 그려보자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아주 작은 디테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해가 저쪽으로 떨어질 때 몇 가지 색으로 빛나던 머리카락의 색깔, 둥글었던 이마 모양, 눈 옆에서 반사되던 솜털, 눈이 부셔서 약간 찌푸린 눈동자. 여기서 조금 더 힘을 내야 했다. 코와 입, 입술, 그때 했던 말, 목소리와 말투까지 가까스로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형태를 완성한 후에, 다시 배경으로 돌아가면 그새 희미해지고 말았다. 기억하는 얼굴이, 둘이서 좋았던 모든 배경에선 사라져 있었다. 모든 게 고약한 꿈 같았다. 얼굴에만 안개가 끼어 있었다.


처음엔 냉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극복하는 일과 상대를 잊는 일은 다른 거잖아? 회복할 순 있지만 그렇게까지 잊어야 해? 사람이 단단해지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여겼다. 가끔 친구랑 둘이서 지나간 인연에 대해 이야기할 땐 본의 아니게 차가운 사람 취급을 받았다. 미련을 안주 삼아 씁쓸하게 한 잔 정도 마시는 술이 달게 느껴지는 때도 없지 않으니까. 하지만 회상하면서 미화하는 이별에는 취미가 없었다. 어쩌면 방어 기재가 작동한 것 같았다. 친구한테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생각하면 너무 슬프니까 아주 지워버렸나봐. 그런 기억은 뇌가 알아서 지워준다며? 아니면 뭐, 그냥 외면하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데 돌이키면 뭐해? 이별을 어떻게 미화해? 세상에 쿨하고 예쁘고 좋았던 이별이 어디 있어? 넌 그렇게 헤어진 적 있어? 좋을 땐 좋아서 같이 있었고, 헤어질 땐 더 이상 좋을 수 없어서 그랬던 거 아니야? 그때 그렇게 추하게 울고불고 그랬던 거 생각만 해도 슬퍼. 피곤해. 그거 말고도 피곤한 일 천지야.”


그래서, 이별 후엔 늘 정면승부였다. 아무것도 피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좋아했던 물건, 작은 선물, 깜빡 잊고 놓고 간 물건을 억지로 버리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두고, 시선이 갈 때마다 피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저릿하면 아직 이별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다시 무뎌질 때까지, 상처에 생긴 딱지가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더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매번 아파하면서도 그리워하진 않았다. 보고 싶다는 말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한테 하는 거니까. 그립다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다 끝난 인연끼리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노을처럼 허무했다. 단 한 번도, 이별의 아픔이 남은 사랑의 증거였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옛날에 쓰던 지갑 속에서 딱 신용카드 크기만큼 잘라놓은 사진을 발견했을 땐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아마 로맨틱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늘 갖고 다니다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길 원하는 마음, 휴대전화에 수백 장씩 들어있는 사진과는 약간 다른 무게감, 스트리밍 대신 LP를 선택하는 저녁의 낭만 같은 것. 역시 모든 게 선명하게 생각났다. 너무 추워서 말할 때마다 하얗게 입김이 나오던 날이었다. 우린 어떤 동상 앞에 좀 왁자지껄하게 서 있었다. 해는 저쪽으로 지고 있었다. 추워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할 때 지갑 속에 넣어둔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 웃는 그 얼굴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인데도 그랬다. 이상한 체험. 나는 그래서 굳어있었다. 그때 그렇게 사랑했던 얼굴인데, 우리가 헤어지던 장면 속에서 기억하던 그 얼굴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였다.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 걸까? 좋았던 시간은 그렇게 액자처럼 지갑 속에 걸려있었던 걸까? 사랑했던 그 얼굴이 거기서 웃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동안, 우리는 각자 변하고 있었다. 몇 개월의 좋은 시간, 서서히 멀어지는 걸 피부로 느낄 때의 서늘한 감각, 마침내 우리가 함께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순간이 계절처럼 흘렀다. 그렇게 좋았던 그 사람과 이별했던 그 사람이 지갑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 되었을 때, 이별은 마침내 완료된 것 같았다. 보고 싶은 사람은 먼 나라에 있었다. 사진은 다시 지갑 속에 넣어 두었다. 이제는 쓰지 않는 지갑이었다.

CREDIT

에디터 김은정
글 정우성
사진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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