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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1. SAT

SCODE #13

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하러 갈래요? 라고 말했더니


주말에 만나기로 한 V가 갑작스럽게 도쿄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해서 평일 저녁에 만났다. 도쿄라면 이번 추석 연휴에 함께 가기로 한 도시였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도 도쿄에 간다고? 여행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지난 주에 만난 남자가 1박2일로 다녀오자고 하더라구. 여행 경비는 자기가 내겠다면서. 우리가 가려고 계획을 세워둔 곳이랑은 겹치지 않으니, 내 먼저 다녀오겠소.”


남자라니, 지난 주말만 해도 V는 학회 준비로 정신이 없다며 당분간 연애할 마음도 체력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응, 연애는 아니고 그냥 만나보는 중이야.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왕창 받아서 퇴근하는 길에 소개팅 어플을 깔았거든. 일과 관련 없는 남자 사람을 만나서 수다가 떨고 싶더라구.”


일 하느라 척박해진 마음을 낯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고디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상냥하게 풀고 싶었던 V는 지금 당장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광화문 근처에서 만난 남자의 차에서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고 서울의 밤 드라이브를 즐겼다. “차를 세워놓고 둘이서 깔깔거리며 끝없이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 거야. 뭔가 더 할 말도 없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랑 옆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아이스크림만 먹고 헤어지긴 좀 아쉽더라구. 그래서 하러 갈래요? 라고 말했어.”


하다. DO. する. Hacer.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가 없는데도 우리 모두 딱 알아듣는 말. V의 제안에 남자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그러나 내심 본인도 원했다는 일이었다는 듯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근처 호텔에 도착한 둘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 입으로 말하기 좀 웃긴데, 끝나고 나서 침대에 누워있는데 그 남자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라고.”


V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 말을 내뱉을 때 나도 질색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연애와 섹스는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여자가 먼저 섹스를 제안하는 게 너무나 생경한 체험이라 그런 여자에게 사랑을 느껴버리는 남자라니. 물론 V 같은 여자는 유일하다. 아니 우리 모두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런데도 남자들에게는 구걸하듯 애걸복걸해야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자들과 산뜻하게 섹스하자는 말을 먼저 할 수 있는, 세상 하나 밖에 없는 여자로 나눠지나 보다.


“여자랑 섹스 하기 너무 어렵다고, 섹스 한 번 하는 것 가지고 세상 권력 다 가진 것처럼 자신을 휘두르려고 하는 여자들한테 지쳤대.”


그러게. 대체 섹스가 뭐길래 남자들은 그토록 못해서 갈망하고 여자들은 그걸 하지 않는 것으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까? 사랑 받고 싶고, 남자의 관심을 내게 묶어두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한들, 그렇게 섹스를 유예시켜서 얻는 권력이라고 해봐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젊고 생기 넘칠 때 한 번이라도 더 해보는 게 훗날 ‘그때 참지 말고 많이 할 걸’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 일이 될 텐데. 결과론적으로 충동적인 듯 그러나 자신의 욕구를 명확히 알고 섹스를 제안한 V가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마는 것이다. V가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자가 마음에 들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처음 만난 날이라도 하자고 말하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세상에 너 같은 여자는 없어. 남자들의 그런 반응도 사실 웃긴다. 인생을 너무 편협하게 살아오셨던 것은 아니고? 


남자만 성욕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섹스를 하고 싶다는 말을 여자가 드물다니, 여자들에게 그토록 주체적이 되라고 말하지만 섹스를 제안하는 일만큼은 남자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되어버린 게 이상하다. 단지 부끄럽기 때문에? 그 말이 부끄러운데 남자 앞에서 옷은 어떻게 벗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온라인 톡으로 유행하는 표현 중에 ‘노란색사고싶다’와 ‘옷파랑색사고싶다’가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대체 무슨 말인가 했다. 몇 번 따라 읽어보니 ‘너랑 섹스하고 싶다’와 ‘오빠랑 섹스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해서 저렇게 쓰면 센스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것인지, 하고 싶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 말하면 덜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일까? 그렇게라도 섹스하자고 말은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보다 어째서 대한민국의 성 의식은 나아진 게 없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인지 그걸 명확하게 해두면 섹스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고 싶다. 너랑 섹스하고 싶어. 여자든 남자든 누구든 하고 싶은 사람이 정확하게 자기 욕구를 말하고, 상대방의 동의를 구한 뒤 안전하고 좋은 섹스를 하는 일이 ‘밥 먹고 싶어’, ‘잠 자고 싶어’와 같이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은 날이 제발 좀 빨리 오길 바란다.

CREDIT

에디터 김은정
글 현정
사진 영화 <아이 필 프리티> 스틸컷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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