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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9. TUE

WATCH ME LOVE

연애 관찰 시대

다른 이들의 데이트를 관찰하며 설레는 우리는 대리연애의 시대를 살아가는 걸까?

스무 살 무렵에 좋아했던 순정만화를 얼마 전 다시 읽다 ‘펑펑’ 울었다. 순정만화 속 주인공들은 어쩌면 이토록 순수하게 영원을 맹세할까? 주로 고교생인 주인공들의 연애는 종종 서투르지만 이들의 감정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투명하다. 배려, 용기, 솔직함, 성장….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단어들. 흠. 그러고 보면 수많은 드라마가 남녀 주인공의 아역 시절을 등장시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0대 시절을 공유한 성인 남녀의 사랑은 어쩐지 한층 진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고 자란 이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이토록 헌신적이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나 또한 언젠가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정교한 순정만화 같다. 드라마는 진아(손예진)와 준희(정해인)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질질 끌지 않고 곧바로 ‘연애 모드’로 진입한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베프’의 남동생. 성인이 된 뒤 자주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이후 드라마는 맘껏 사랑하고 사랑받을 준비가 돼 있는 시기, ‘연애라면 응당 이래야지’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클리셰를 쏟아붓는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영화관에서 콜라 하나를 나눠 마시고, 택시를 탔다가도 보고 싶다는 말에 내리고, 처음으로 슬며시 마주 잡은 손은 관계의 신호탄이 되는…. 이토록 익숙한 연애의 문법들, 누구나 알 수 있는 신호들이 이렇게 쏟아지는데 설레지 않을 수가! 친구 커플과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눈 내린 나무숲 위를 뒹굴며 뽀뽀하는 두 사람을 보며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예쁘긴 예쁘네.’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가 구경하는 것은 드라마 속 연애뿐이 아니다. 2018년 봄, 사랑에 대해 가장 열심히 떠드는 것은 다름 아닌 예능 프로그램이다. 각양각색의 사연에 MC들의 코멘트가 더해지는 <연애의 참견>과 <연애직캠>이 네이트판 사연을 읽는 기분이라면, 비연예인 출연자들이 ‘썸’ 타는 과정을 담은 <하트시그널 시즌2> <선다방> <로맨스 패키지> <너에게 반했음> 같은 프로그램은 VR 체험 같다. 진짜로 내가 다 설레고, 내가 다 흐뭇해지는 신나는 대리 연애 체험의 세계!
‘심장폭행… 진짜 좋다’ ‘이게 무슨 설렘 대잔치’ ‘미쳤다 대박’ <하트시그널 시즌 2>에서 가장 큰 응원을 받았던 두 사람, 김현우와 오영주의 대화라며 유출된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서로 오해한 상태로 데이트를 마친 두 사람이 시그널 하우스로 돌아와 나눈 오디오를 해석한 자막은 다음과 같다. ‘김현우: 진짜 미치겠네. 좋아한다고/ 오영주: 누구를? / 김현우: 너를.’ 이 영상을 둘러싼 열렬한 반응은 사람들이 이들의 연애에 얼마나 이입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자막이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몇몇은 오히려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트시그널 시즌2>가 보여주는 것은 ‘요즘 사람들의 합리적 연애’다. 같은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묘한 기류가 돌 때도 있지만 질투나 견제의 수준은 상식적이며, 데이트의 과정도 매끄럽다. 흑역사라는 단어는, 이들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선다방>도 마찬가지다. 이적, 유인나 등 네 명의 카페지기가 카페에 시간대별로 찾아온 일반인 남녀를 관찰하는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도 역시나 제법 멀쩡하다. 그리고 (소개팅에 가까운) 맞선 장면을 통해 우리는 결혼과 100세 시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미래 때문에 고민하는 타인의 연애관과 인생관까지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출중한 외모에 성격도 괜찮은 출연자들은 고급 빌라인 시그널 하우스(<하트시그널>)와 아기자기한 삼청동 카페(<선다방>), 오성급 호텔(<로맨스 패키지>)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연예인이 아니라고 해서 이들의 존재 또한 마냥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무균실 같은 환경에서도 출연자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진짜다. 온도 차이가 있을 뿐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겼을 때 우리가 보내는 신호를 출연자들도 보내며, 이들을 지켜보는 MC와 패널들은 이 상황이 ‘리얼’이라는 것을 호들갑스럽게 여러 번 확인시킨다. <우리 결혼했어요> 수준의 극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기꺼이 속아주고 연애의 설렘을 만끽할 준비가 돼 있는 셈이다. 그만큼 이 가상세계는 현실이 과도하게 끼어드는 순간 쉽게 빛을 잃기도 한다. 지난 5월 3일 정규 첫 방송을 한 <로맨스 패키지>에서 강조된 것은 관계보다 스펙이었다. 파일럿 방송에서는  ‘반전 매력’이라며 남성 출연자의 자동차와 재산을 추후에 공개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니, 저는 결혼정보회사 매니저들이 만든 것 같은 프로그램을 보려는 건 아니었는데….


결국 우리가 TV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연애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사랑은, 연애가 궤도에 오르고 현실의 갈등이 끼어들면서 유지하는 데도 급급해진다. <하트시그널>은 커플의 탄생까지만 비추고, <선다방>은 탐색전을 보여주는 데 그치며 <너에게 반했음>은 아예 ‘풋풋한 10대 연애’라는 판타지를 카드로 사용한다. SNS로, 드라마로, 예능으로…. 다른 이의 연애를 관람하는 데 익숙해진 지금의 현상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 연애를 포기했기에 타인의 연애를 소비하게 된 세대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데이트 폭력, 안전 이별, 여성 혐오 등 연애의 시작조차 주저하게 만드는 단어가 넘쳐나고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는 시인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몰라야 한다’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SNS의 수많은 커플 인증 샷, 계속 업데이트되는 연애 신조어, 각 학교의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라오는 절절한 사랑 고백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지금 세대야말로, 연인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긴밀한 관계를 간절히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믿는다. 때로는 과시적이고 서툴더라도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모두를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 거라고 말이다.  눈물을 펑펑 흘렸던 만화 속 대사는 다음과 같다. “어른이 된 우리가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그때만큼은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우리밖에 없고 이 순간이 무엇보다 진실되며 꿈같고, 찰나이면서 영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화의 제목은 <우리들이 있었다>. 사랑의 가능성을 순수하게 믿었던 우리들이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원형을 찾아 헤매며, 우리는 오늘도 TV 속 연애를 바라본다.

CREDIT

에디터 이마루
아트 정혜림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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