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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MON

THE BIG

코미디언의 진담

요즘 유독 커 보이는 유병재

블랙 수트와 체크 패턴의 후디드 셔츠는 모두 Ordinary People. 운동화는 Adidas Originals.


어유, <전지적 참견 시점> 찍는다고 스튜디오 사방에 카메라가 깔려 있어 진땀 뺐어요. 이런 환경, 익숙한가요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나마 자주 하다 보니 처음보다 편해졌어요.
대중의 시선은 어때요 양날의 검인데, 아직까진 안 좋은 것보다 좋은 게 더 많아요.
뭐가 좋아요 관심받는 게 좋아요. 그 맛에 이 일을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 내 이름을 알고 나를 알아봐주는 성취감이랄까.
많은 사람이 유병재라는 이름을 검색하고 유병재 때문에 웃어요. ‘뭘 해도 된다’는 자신감이 있나요 농담 한마디를 만들 때 최소한 다섯 명한테 물어봐요. 뭐가 맞고 웃긴지 여전히 감을 못 잡겠어요. 10년, 20년 하다 보면 그땐 뭐가 보이겠지 하며 스스로 다독이고 있어요.
‘유병재는 천재 같다’는 댓글이 많던데요 제가 추구하는 농담 스타일이나 문법이 그런 오해를 받기 쉬운 것 같아요. 재수없게 들릴 수 있는데, 코미디를 문학적으로 접근하려 해요. 짧고 함축적으로 비유하고 그 비유도 관계가 먼 관념을 갖다 붙이길 좋아해요. 예를 들어 초콜릿을 설탕이 아니라 석탄에 빗대는 식으로.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라는 말을 들으면 되게 기뻐요.
“똥이 안 나온다. 난 이제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농담집 <블랙코미디>에 쓴 이 글은 어떤 상황에서 나왔나요 고등학생 때 화장실에 한 낙서인데 끝도 없는 자괴감을 표현해 보려고 했어요.
‘저 사람 천재다’라는 경우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순간적인 재치나 기지를 발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요. 저는 코미디언이긴 하지만 작가에 베이스를 뒀어요. 순발력이나 애드리브가 부족해요. 그 대신 시간을 주면 잘 준비해서 밀도 높은 코미디를 할 자신은 있어요.
예능 프로그램의 유병재도 정말 웃겨요. 이 상황이 얼마나 황당하고, 뻔뻔하고, 힘든지 생생히 느껴지는 표정과 리액션이 압권이에요 그렇게 봐주시면 다행이에요. 프레젠터랄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를 표현하는 역할을 해도 괜찮겠다 싶었어요. 방송작가 경험이 있다 보니 이 상황에서 제작진은 이런 그림을 의도하지 않을까, 눈치도 많이 봐요.
요즘 코미디의 흐름은 예전에는 웃음이라는 게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확실했어요. 코미디언이야말로 웃기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었어요. 지금은 그 구분이 희미해진 것 같아요. 인터넷과 SNS만 봐도 말도 안 되게 재치 있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말에 많이 귀 기울이게 돼요.
팬들의 메시지를 SNS에 공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유병재 팬들은 유병재보다 더 웃기다면서요 SNS를 개인적 용도보다 코미디 채널로 쓰고 있어요. 다 같이 놀 수 있는 운동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팬들의 다이렉트 메시지(DM)를 캡처해서 SNS에 올렸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판을 깔아주는 게 중요해요.



오렌지 스웨터는 Rubato 103. 옐로 틴티드 선글라스는 Carin.



오렌지 스웨터는 Rubato 103. 네이비 팬츠는 Beyond Closet. 옐로 틴티드 선글라스는 Carin. 운동화는 Adidas Originals.


4월에 예정된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유병재에게 어떤 판인가요 저는 협업을 못해요. 나 혼자 잘났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능력이 없어요. 여럿이 하면 하루에 끝나고, 혼자 하면 한 달이 걸리는 일이 있다면 저는 혼자가 나아요. 그런 점에서 직접 대본을 쓰고 혼자 공연을 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와 제일 잘 맞아요.
스탠드업 코미디 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지난해 8월에 했던 첫 공연이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되기도 했어요. 다시 할 정도로 뭐가 그리 좋았나요 스스로 코미디언이라고 말하지만 관객이 많은 무대에 서본 경험이 거의 없었어요. 부끄럼을 많이 타기도 해요. 마이크 하나 가지고 혼자서 말로 풀어가는 무대라니, 걱정됐어요. 그런데 관객들이 잘 웃어줬어요. 그게 되게 짜릿했어요. 이전에 받은 피드백은 거의 댓글이나 활자화된 반응들이었어요. 무대에서 관객의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를 바로바로 접하면서 ‘이 맛에 코미디언들이 무대를 잊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번 공연에서 기대되는 건 지난해에는 200석 규모의 소극장이었는데 이번에는 1000석이 넘는 곳에서 해요. 1000명이 웃어주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느껴질지 궁금해요.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선 본인 말고 의지할 데가 없다면서요. 중압감은 어떻게 이겨내나요 로빈 윌리엄스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시절 관객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어서 만약 간호사라고 하면 즉석에서 간호사를 소재로 사람들을 웃겼대요. 저는 그 정도 깜냥이 안 돼요. 단어 하나, 토씨 하나까지 대본을 달달 외우고 동작과 말투를 반복해 연습하면서 불안을 덜어내요.
코미디를 짤 때 경계하는 건 코미디에서 ‘이건 안 된다’라고 법으로 정해놓은 건 없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농담 한마디를 하는 것보다 재미있어도 하지 말아야 할 농담 한마디를 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누군가의 바보 같은 실수는 코미디 소재로 삼거나 조롱할 수 있어요. 하지만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희화화하지 않으려고 해요. 예를 들어 유병재의 키가 작은 건 유병재의 선택이 아니에요. 물론 저는 제 키와 외모를 가지고 남을 웃길 수 있어요. 제 얘기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최대한 조심하려고 해요.
유병재 하면 떠오르는 시사 풍자는 어떤가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정치를 다뤄야 한다는 것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느냐를 우선으로 생각해요. 작년, 재작년만 하더라도 전 국민이 다 아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코미디 소재로 사용했던 거예요.



아노락 점퍼는 Umbro. 안에 입은 레드 집업 트랙 점퍼는 Onitsuka Tiger. 골드 체인 네크리스는 Monday Edition.


첫 공연의 제목은 <블랙코미디>였어요. 이번 공연은 <B의 농담>이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제가 하는 것들이 다 농담이니까. B는 열린 해석이 가능하도록 했어요. 저와 관련해 알파벳 B로 통용되는 게 꽤 있더라고요. 블랙코미디, 병재, B급.
‘유병재 유머는 B급 감성’이란 말에 동의하나요 스스로 B급 유머나 B급 정체성을 지향한 적은 없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그럼 유병재 유머의 감성은 뭔가요 어려운 질문인데, 권투에 비유하면 공격을 못하고 계속 맞다가 소심하게 ‘쨉’을 하나 날리는 느낌으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비록 상대방은 아프지 않더라도 ‘나도 주먹 있어’ 하는 식으로.
유병재를 웃기기란 쉬운가요 평소 잘 안 웃어요. 뭔가 웃겨도 소리 내어 웃는 경우가 드물어요.
웃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요 유튜브에서 아기 영상, 고양이 영상을 찾아봐요. 신기하게 볼 때마다 미소가 지어져요. 힘이 없거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보면 기운이 나요.
유병재의 다음 스텝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오랫동안 해야 할 것 같아요. 공도 많이 들였고, 잠깐 하다 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스탠드업 코미디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코미디 쇼를 한 케빈 하트처럼 많은 관객 앞에 서고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 정도면 잘 살았네’라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첫날 인스타그램에 ‘새해에는 얼굴도 작아지구, 키도 커지구, 돈도 마니 벌구, 근육도 생기구, 인기도 많어지구, 아침에 잘 일어나구, 밥도 안 냄기구, 콜라랑 담배도 줄이구, 아무두 미워하지 않구, 이 세상 모두모두를 사랑하구 싶어여’라고 썼어요. 이 목표는 얼마나 이뤄가고 있나요 아침에 잘 일어나는 것 빼고 다 못 지키고 있어요. 무슨 생각으로 썼나 싶어요.
이중에 꼭 이뤘으면 하는 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미움받는 게 싫어서 화를 못 낸다면서요. 유병재는 착한 사람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못되지는 않았어요. 최대한 예의를 차리고, 남한테 상처 안 주려고 해요.
착한 데다 웃긴 남자가 여기 있었네요 저는 제가 별로 안 웃겨요.

CREDIT

사진 박현구
에디터 김영재
스타일리스트 주희C
헤어 재현(SOON SOO)
메이크업 김모란(SOON SOO)
어시스턴트 ELENA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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