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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6. FRI

A NEW LADY

최희서에 관하여

서른둘 최희서를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우연이 아니다. 연기와 인생을 대하는 그녀의 방식은 '진심'뿐이다

크리스털을 장식한 니트 풀오버는 Dries Van Noten. 드롭 이어링은 Vintage Hollywood. 골드 링과 블랙 원석의 링은 모두 Haesool. 실버 링은 Katenkelly.


실크 리본 톱은 Zara. 데님 팬츠는 Zadig & Voltaire. 레드 스틸레토 힐은 Rachel Cox. 골드 이어링은 Katenkelly.


지금까지 <박열>을 통해 받은 트로피가 몇 개나 되나요 아홉 개요. 더 이상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대종상 여우주연상이요. 아예 기대를 안 하고 있던 터라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았어요. 제 이름이 불렸을 땐 정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레드 카펫 밖에서의 삶도 많이 달라졌나요 전 변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이 달라졌어요. 좋은 쪽으로는 그동안 저를 걱정해 주신 부모님과 응원해 준 친구들이 기뻐하고요, 살짝 씁쓸한 면은 연락 없던 이들한테 갑자기 연락이 오거나 여러 부탁이 들어오는 것. 물론 그중에는 응하고 싶은 좋은 것도 있지만요. 이준익 감독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복주머니가 제 앞에 툭 떨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복주머니 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독일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부탁과 청탁이 들어올 것”이라고요.
최희서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어떤 건가요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제가 스스로 굉장히 다그치는 성격이거든요. 오랫동안 매일 행복하고 웃을 때보다는 ‘오디션은 어떡하지?’ ‘누구한테 연락해서 미팅이라도 해달라고 할까’ 하고 종종거린 때가 더 많았어요. 심지어 <박열>을 찍고 난 뒤에도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그다음엔 어떡하지?’ 하고 마음이 분주했어요. 막상 할 일이 정해지고 나면 그때부턴 그것에만 집중하는데, 중간에 붕 뜨는 시간을 잘 못 참겠어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긴 무명 시간을 견딜 수 있었나요 저는 뭐가 안 되면 계속 시도하는 타입이에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오디션은 가리지 않고 했고, 그것도 안 되면 혼자 영상을 찍어 제 연기를 검토해 보곤 했어요.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조바심과 근심으로 가득한 생활이 연기에 묻어날 것 같다는. 저는 집에서 뒹군 적이 없어요. 좀 뒹굴어볼까 마음먹었다가도 금세 ‘대본 읽어야 하는데’ ‘추천받은 영화 봐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바꿔요. 좋게 보면 열정이 엄청난 거고, 나쁘게 보면 마음의 여유가 너무 없는 거죠. 지난해에 일어난 좋은 일들로 인해 그나마 나아진 게 지금이에요.
연기에 대한 열정의 싹이 처음 시작된 건 초등학교 학예 발표회 때 연극 <심청전>에서 심청 역을 맡았어요. 무대 위에 조명이 켜지고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이 보이는데, 가슴이 너무 두근대고 좋은 거예요. 그 장면이 그림처럼 남아 있어요. 그러다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금요일에 한 시간씩 ‘액팅’ 수업을 들었을 때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 실현될지 모를 꿈을 향해 자신을 계속 담금질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네, 어려운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전 연기할 때면 다 잊거든요. 그러는 게 좀 숨통이 트인다고 할까. 대사 한마디 하기 위해 현장에서 며칠씩 대기하면서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나 확신이 있었는지 둘 다인 것 같아요. 연기하면서 다행히 많은 분한테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만약에 “너 연기 못해, 재능 없어”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당연히 견디기 힘들었겠죠. 돈도 잘 못 벌고 오디션도 많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연극이든 단편영화든 제 연기를 좋아해 주는 분들이 있었고, 그런 칭찬이 정말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촬영감독님이나 스태프가 “너 어디서 연기했니?” 하고 물어보시면 ‘그래도 내가 배우로서 가치가 없진 않나 보다’라고 생각했어요.



핑크 프린지 드레스는 Marc Jacobs.


어떤 소녀였는지 궁금해요 애어른이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해외생활을 하면서 불안한 정서가 좀 있었어요. 어딜 가도 적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 위한 스트레스가 컸어요. ‘나는 누구일까’ ‘난 한국 사람인데 여기서 뭘 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한국에 들어오면 아이들의 눈총을 받았죠. 워낙 생각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늘 고민이 많았어요. 사춘기도 막 반항하고 그런 게 아니라 제 안으로 파고드는 쪽이었죠. 한편으로 연기 수업을 들을 때는 많은 것을 표출하려고 했어요. 한마디로 복잡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유년기의 그런 경험이 예술에는 양분이 되기도 하는데 물론이에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경험했기에 일본인도 연기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한 인간을 볼 때 시야가 좀 넓은 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작품 속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을 다뤄도 그게 이해가 안 되거나 이질감이 든 적은 없었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여성 스타나 아티스트가 있나요 리브 울만이라는, 지금은 할머니가 된 배우이자 감독이 있는데, 대학교 때 한창 영화를 많이 보던 시기에 그분을 알게 되어 모든 작품을 다 챙겨봤어요. 또 에디트 피아프를 좋아해서 마리옹 코티아르가 주연한 <라 비 앙 로즈>도 너무 인상 깊게 봤죠. 여자가 주인공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은 거의 다 본 것 같아요. 특히 마거릿 대처나 엘리자베스 여왕, 아웅 산 수지 같은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들을 즐겨 봤고,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달 <엘르> 코리아의 스페셜 테마가 바로 ‘여성’이에요. 지금까지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살아온 편인가요 일단 저는 다음 생에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제가 여자인 게 좋아요. 아주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화장이라든지 패션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라면서 멋진 여자배우들을 볼 때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느꼈고, 여자 몸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자라는 편견에 부딪히거나 실망했던 경험도 있나요 요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예전보다 더 많이, 더 잘 들리잖아요. 사실 어릴 적엔 제가 여자라서 차별받는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어요. 이 일을 시작하고 난 후 ‘여자는 예뻐야 해’ ‘여배우는 이래야 해’ 등의 말을 자주 듣게 되면서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대학교 2학년 때인가, 항상 긴 머리를 유지하다가 쇼트커트를 한 적 있는데, 그런 잣대에서 좀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여자이고, 사람들에게 어떤 여자로 보이는지에 대해 탐구했던 흔적이 제 안에 남아 있어요. 무엇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너무도 훌륭한 여성이자 인간을 연기했던 배우로서 앞으로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그녀를 연기하면서 여자로서 가장 영향을 받은 점은 뭔가요 참 아이러니한데, 자신을 ‘여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배우’란 말도 마냥 편하게 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여배우인데 왜 이런 데 앉아요? 좋은 데 앉으세요.” 이런 지나가는 말에도 몸이 딱 반응을 해요. 그리고 이제 수동적인 캐릭터는 제게 잘 안 들어오더라고요(웃음). 지금 정해진 작품이나 보고 있는 시나리오도 전부 능동적인 여성의 이야기예요.
차기작에선 어떤 여성을 그려낼지 궁금해요. 먼저 촬영을 마친 영화 <아워 바디>는 서른한 살 ‘자영’의 이야기라고요 31년 동안 머리만 써온 인물이에요. 몇 년째 계속 시험에 떨어지면서 고시 공부를 하며 살다가 어느 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리는 무리를 보고 자신도 뛰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차츰 그녀의 몸도 변하고 삶에 대한 태도도 변화하죠.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정해진대로 살아오던 여자가 처음 능동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해본다는 것, 그게 여태까지 해온 공부처럼 앉아서 하는 게 아니라 무작정 뛰는 거라는 데 호기심이 들었어요. 또 영화는 몸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금 현대사회에서, 특히 한국에서는 자신의 몸을 친근하게 느끼거나 자기 몸을 잘 살펴보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낯설기도 하고, 동시에 공감 가는 시나리오였어요.


오프숄더 드레스와 튤 스커트는 모두 MSGM by ihanstyle.com. 크리스털 장식의 버클 벨트는 Roger Vivier. 이어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4월 방영 예정인 OCN의 <미스트리스>(가제)에도 캐스팅됐어요. 여기서도 흥미로운 여자를 연기하나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후미코를 연기했던 제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어요. 제가 맡은 ‘정원’은 그야말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 30대 초반의 교사이고, 딱 나이에 맞는 정도의 벌이를 하고, 결혼은 했으나 아직 아이는 없는 여자. 조금 더 제 생활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역할이라서 좋았어요. 단편이나 독립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것 말고는 평범한 20~30대 한국 여자를 연기한 적이 없거든요.
결혼한 여자라는 설정이 본인과 가장 큰 차이점일 듯한데 제가 이제 서른둘인데, 친구들을 만나거나 결혼식 같은 데 가면 자연스럽게 들리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때마다 쫑긋쫑긋 귀를 세우고 있어요. 물론 결혼해 본 적은 없지만, 일본인 아나키스트도 연기했는데 한국인 기혼 여성쯤이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첫 드라마 주연이라 부담도 되고 긴장도 되는데, 얼마 전 친한 여자 감독님이 저한테 “나는 내 실력 이상으로 잘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다.” 그러시더라고요. 명언인 것 같아요.
연애에서도 연기를 대할 때만큼 열정적인가요 저는 모든 것에 열정적인 편이에요. 물론 사랑할 때도 그렇고요. 누군가를 만날 때, 대충 만나다가 대충 헤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제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감수성도 예민한 편이라 좀 더 안정된 느낌의 나무 같은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돼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요 진솔함? 사실 저는 친구가 많지 않아요. 왜냐하면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가깝게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만나서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술자리도 왁자지껄한 데보다 친한 사람끼리 한잔하는 걸 선호해요.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 그 한 자리 한 자리가 소중해요. ‘언제 한번 보자’ ‘밥 먹자’라는 얘기도 진심이 아니면 잘 안 해요(웃음). 누가 보면 너무 진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뭘 하든 누굴 만나든 당연히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최희서의 일상에 크고 작은 행복을 주는 것은 저희 집 강아지. 그리고 저 맛있는 거 좋아해요. 운동하거나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요. 활발하게 사는 편이에요. 요즘에는 내 삶에 음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악을 좀 찾아 듣고 있어요. 제 플레이리스트에는 열여섯 곡밖에 없거든요. 사연이 있는 곡이거나 좋아하는 영화 OST가 전부인데, 그 폭을 좀 넓혀보려고요. 니콜 키드먼, 리즈 위더스푼 등이 출연하는 <빅 리틀 라이즈>라는 미드에도 빠져 있어요.
그 역시 연대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죠. 근래 본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는 <워터 오브 셰이프: 사랑의 모양>이라고 아직 개봉 전 영화인데, 홍보를 도우면서 미리 보게 됐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국 배우 샐리 호킨스가 맡은 역할이 매력적이에요. 극중에서 말 못하는 여자로 나오는데, 수화와 눈빛으로 어마어마한 감정을 전달해요. 영국의 명성 있는 연극학교 출신인데, 제가 거기 가려다가 떨어져서 잘 알아요(웃음). 누가 봐도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저예산 영화에서 주연을 하며 특유의 분위기와 연기력으로 주목받은 배우예요.
최희서도 그처럼 전형성에서 벗어난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마음속에 어떤 커리어를 그리고 있나요 지금은 제 나이에 맞는, 제가 할 수 있는 다양한 한국 여성을 연기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시나리오 쓰는 걸 좋아해서 언젠가는 제가 쓴 이야기에 직접 출연해 보고 싶어요. 또 가까운 미래는 아니지만 국제적인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할리우드에 국한된 건 아니고, 유럽도 좋고 이란에도 좋은 영화가 많거든요. 막연히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언제가 될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CREDIT

에디터 김아름
사진 신선혜
스타일리스트 오주연
헤어 조미연
메이크업 이영
어시스턴트 방지선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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