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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SUN

NO BETTER THAN THIS

이엘의 ‘말간’ 얼굴

‘빨간 립스틱’을 지우니 말간 미소가 보인다. 옥인동, 고양이, 패왕별희… 우리 앞에 선 이엘을 읽는 새로운 키워드

시스루 베이지 터틀넥과 베이지 스웨이드 와이드 팬츠는 모두 Max Mara. 슈즈는 Nike.



오버사이즈 화이트 셔츠는 Balenciaga.



의외로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하던데요 맞아요. 아직도 사진 찍히는 건 어려워요. 그나마 오늘은 편안한 날이었어요.

화면과 실제 인상이 달라요. 더 예쁜 것 같아요. 말간 느낌이에요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말이 있는데 예쁘다는 말이 그래요. 어색해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개성 있는 마스크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거든요. 사실 제가 그렇게 예쁘진 않잖아요?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나요 콘텐츠 생산하는 분들의 세대도 바뀌고 시선도 바뀐 것 같아요. 어느 방향에서 찍어도 완벽하게 예쁜 얼굴이 각광받는 시대가 있었잖아요. 전 그런 얼굴은 아니거든요. 요즘 저를 불러주실 때마다 기분 좋으면서도 내심 ‘나를? 왜?’ 하고 되묻게 돼요.

꽤 많은 작품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지금 이 자리에 왔잖아요. 작품이 먼저 ‘나를 찾아준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인가요 영화로 치면 장진 감독의 <하이힐>(2014) 때부터인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제가 저를 알리려고 엄청 뛰어다녔다면 이 작품부터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거죠.

<내부자들>(2015)은 어땠나요 감독 미팅이 잡혔다기에 오디션 볼 생각으로 잔뜩 긴장하고 나갔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해봅시다”가 된 거예요. 신기했죠.

나를 위한 캐릭터가 준비돼 있다는 건 참 감격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정말로요. 캐스팅 제안이 먼저 온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예요. 로또 맞을 확률인 거죠.

외부에서 보기에 배우 이엘의 터닝 포인트는 <내부자들>이겠지만 스스로는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드라마 <엄마의 정원>(2014)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 드라마를 만나기 직전까지 마땅히 연기할 기회가 없어서 오기에 차 있었거든요. ‘누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며 벼르고 있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자취방에서 혼자 많이 울었죠. 그 시절엔 정말 돈이 없었어요. 홍대 근처에 살았는데 당시 미술학원 모델 아르바이트가 건당 3만원이었어요. 온종일 김밥 한 줄 먹으면서 모델로 서기도 하고. 그러다 <엄마의 정원>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된 거예요. 제가 맡은 캐릭터 자경의 말투나 옷차림 등이 선머슴 같거든요. 그냥 평소대로 연기했더니 같이 해보자고 하셨어요. 그 드라마가 없었으면 계속 아르바이트하면서 더 오래 버텨야 했을 거예요.

그렇게까지 이 일을 포기하기 싫었을까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었어요. 컴맹인데다 딱히 기술도 없고. 공부도 그렇게 잘하지 않았고, 사회성도 없고. 평생 흥미를 가져본 건 오로지 연기뿐이에요. 주변의 모두와 싸웠던 이유도 바로 이거죠. “이렇게까지 힘든데 왜 넌 직업을 바꿀 생각을 안 해?” “왜 방에서 손가락만 빨며 지내는 거야?” 다들 답답해 했어요. 압박이 많았어요.

어느 배우에게든 ‘기다림의 시간’은 있죠. 그 지난한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버텼나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어요. 가끔 TV에서 영화제나 시상식 같은 걸 보는데 나와 비슷하게 데뷔했거나 더 늦게 시작한 배우가 나오면 마음이 복잡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조차 싫을 때도 있었어요. 오히려 나중엔 더 찾아보게 됐어요. 괜찮아, 난 어차피 될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혼잣말을 많이 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지금은 주목받는 시기잖아요. 거기서 오는 감정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 제게 좋은 감정을 표현해 주시면 받아들이는 입장도 아주 행복하죠. 하지만 불쾌한 감정이 들어왔을 때 해결하는 연습은 아직 필요한 것 같아요. 본인은 악의 없이 던진 말일지언정 듣는 입장에서는 많은 생각이 들죠. 다른 단어도 많은데 꼭 저렇게 표현했어야 하나? 앞에 한두 마디라도 매너를 얹어주면 나는 참 고맙게 받을 수 있는데, 왜 꼭 저렇게 찌르듯이 날 아프게 만들지?

심지가 단단해 보여요 제가 지식이 많거나 생각이 깊거나 한 사람은 아니에요.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담금질된 거죠. 제 출발점부터 저를 본 사람들은 지금의 절 짠하게 생각해요(웃음).

출발점에 서 있는 자신을 돌아보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잘 참았어.



벌키한 네이비 터틀넥 니트는 Eudon Choi. 라이트한 색감의 스키니 데님 팬츠는 Evan laforet.



케이프 스타일의 롱 코트는 Max Mara. 화이트 티셔츠는 Rocket×Lunch.



10월 14일 방송 예정인 드라마 <블랙> (OCN)과 이병헌 감독의 <바람 바람 바람>이 차기작인데, 두 작품부터 주연으로 표기되네요  맞아요. 그만큼 책임감과 부담이 커요. 저는 숲보다 나무를 보는 사람인데 작품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더 길러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문득 ‘내가 이걸 해도 되나? 이게 맞나? 나 잘하고 있나?’ 하는 불안감이 들긴 하죠. 기분 좋은 긴장이긴 하지만요. 제가 해온 캐릭터들과 완전히 달라요. 진한 화장을 지우고 힘을 뺀 느낌이랄까. 어떤 반응을 보여주실지 궁금해요.

주변에 예리한 평론가 같은 존재가 있나요 저희 친언니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이에요. 주로 욕을 더 많이 하지만(웃음). 화보 사진이나 인터뷰 기사 등 언니가 보고 좋은 얘기를 해주면 그냥 덮어두고 안심해요.

평소 시간이 나면 뭘 하며 보내는지 일단 나가서 걸어요. 좋아하는 길을 걷거나 미술관이나 공원에도 가고요. 날씨마다 보고 싶은 곳이 달라요. 주로 언니와 다녀요.

이맘때 걷기 좋은 길은 어디예요 옥인동의 수성동계곡 올라가는 길을 좋아해요. 그리고 광화문이나 서울시청 앞, 을지로, 종로 쪽도 좋아해요. 광화문 교보문고에 오시면 아마 저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코너로 가면 되나요 소설 코너요(웃음).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뭐예요 고양이 밥 주기. 자다 깨보면 애들이 절 쳐다보고 있어요. 얼굴을 막 치기도 하고. 집에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는데 고양이들이 눈만 뜨면 ‘야옹야옹’ 해요. 나가고 싶다고. 비몽사몽간에 문 열어주고 밥 주고 다시 누워 밤새 쌓인 SNS 보고 그래요.

인스타그램을 켜면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추천 이미지가 뜨잖아요. 주로 뭐가 뜨나요 강아지나 고양이 동영상요. 아니면 나무 가공하는 동영상. 아무 의미 없이 나무 샌딩만 하고 있는 영상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웃음).

인생의 영화를 하나 꼽는다면요 <패왕별희>(1993)요. 중학교 때 본 것 같은데, 컬처 쇼크였어요. 두지(장국영)는 극에 빠져서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때 배우라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 영상 자체도 아름다운 영화였는데 전 그렇게 뛰어난 이미지를 보면 나도 저 안에 들어가 있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배우의 길을 계속 걷게 하는 힘은 뭔가요 현장에서 듣는 감독님의 기분 좋은 ‘오케이!’ 소리. 이게 진짜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 기분이 2박 3일은 가요. 자기 전에 그 순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요. 너무 뿌듯해서. 저 소박하죠?(웃음) 

삶의 목표가 있나요 거창한 건 없어요. 현재 상황이나 환경, 가족 관계, 살고 있는 집의 크기, 내가 보호할 수 있는 동물들, 일하면서도 주변에 눈 돌릴 수 있는 여유까지 모든 게 딱 적당해요. 지금이 참 좋아요.

CREDIT

사진 목정욱
에디터 김아름
글 김현민
디자인 오주희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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