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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SUN

NO MAKEUP DAY

생얼이 뭐 어때서?

서울 여자와 파리 여자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화장을 철회했다. 그녀들의 노 메이크업 생존기


이번 달 어떤 기사를 쓸지 논의하는 기획회의 시간. “누가 한번 노 메이크업 체험 좀 해봐.” 편집장의 제안에 이 기사가 내게 배당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엘르> 뷰티 팀에서도 화장 열심히 하기로 소문났으니까. 그랬다. 배당에 적힌 에디터 이름은 천나리. 도전을 시작하기 전에 내 생얼의 실태부터 알린다. 일단 피부는 그리 나쁘지 않은 축이다. 눈에 띄는 잡티나 트러블이 없어 컨실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편. 눈썹도 남자 못지않게 짙고 숱도 풍성하다. 문제는 입술. 나는 립 메이크업을 하지 않으면 집 앞 슈퍼도 가지 않는다. 점심시간에도 스마트폰과 지갑, 립스틱만은 반드시 챙긴다. 핏기 없이 창백한 입술 탓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면 아파 보이기 때문이다. 화장이 날라리나 하는 걸로 치부되던 학창시절에도 틴트만큼은 몰래 발랐으니 말 다했지. 스쿠버다이빙과 프리다이빙이 취미가 된 이후에는 입술 문신도 고려했지만 눈썹이나 아이라인 문신보다 훨씬 아프다는 이야기에 즉각 포기했다. 그런 내게 생얼로 다니라니. 아무리 생얼의 효리 언니가 멋지고 노 메이크업(#nomakeup) 셀피가 대세라지만 지극히 평범한 내겐 너무 가혹하지 않나! 드디어 결전의 날. 무색 자외선차단제만 바른 채 아침 밥상에 앉아 이대로 출근해도 좋은지 물었다. “딸, 자신감을 가져!” “누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다. 우리 가족은 늘 이런 식이다. 서로 극진히 응원해 주는 존재. 좋은 점도 있다. 출근 준비 시간이 반으로 줄었다는 것. 일단 마스크를 하고 집을 나섰다(미세 먼지가 고마울 줄이야!). 마스크 덕에 얼굴의 50%는 가릴 수 있었다. 눈만 끔벅끔벅 뜬 지하철 안.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벗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과 마주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 또한 잠시뿐. 지인을 만난 건 9년에 가까운 출근 역사를 통틀어 고작 서너 번이라는 걸 상기했다. 그렇게 눈알을 굴리며 입성한 <엘르> 편집부.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일부러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다. 또르르. 야근이 잦은 마감 때마다 무심하게 출근한 꼴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안경을 쓰고 출근한 날도 쿠션은 두드리고, 눈썹은 그렸건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행으로 여겨야 정상이거늘 섭섭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길로 이 기사를 제안한 편집장을 찾았다. 역시나 못 알아보는 눈치. 음, 뭐지? “저 생얼로 출근했는데….” 이실직고하자 편집장의 말. “아하하, 그래서 좀 아파 보였구나~ 어쩐지!” 나를 생얼로 출근케 한 장본인은 자신의 제안을 잊은 듯했다. 다른 패션 에디터들도 내 생얼이 화장한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내가 원한 반응은 이게 아닌데. 어쩌지? 기사를 재미있게 써야 하는데. 결국 생얼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결정했다. 두근두근.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 사이 심장이 점점 조여왔다. 서핑하다 만난 사이지만 서핑할 때도 눈썹과 입술은 타투 팩으로 미리 색을 물들이고 립 틴트는 주머니에 넣어 다녔거늘. 얼굴을 덮은 마스크에 궁서체로 ‘못생김주의’라고 쓰여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내 마스크를 슬쩍 내리며 하는 말. “뭐야, 립글로스도 안 발랐네? 생얼이야?” “응, 생얼이야. 이제 맨날 생얼로 다닐 거야.” 선포하듯 답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 먹는 내내 “우리 혹시 이따 마사지 받으러 가? 서프라이즈야? 이거 몰카 아니지?” “지금 이래도 날 사랑할 건지 테스트하는 거야?”라며 진담과 농담이 섞인 질문을 쏟아냈다. 평소 같으면 립스틱을 몇 번이고 고쳐 발랐을 텐데. 시간이 지나도 입술 한 번 바르지 않는 내가 이상했는지 초반과는 다른 목소리로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발리에서 서핑할 때도 화장했었나? 서핑하면서 여자 많이 봤는데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엄청 청순해 보여. 애기 같고 강아지 같아. 맨날 이렇게 다녔음 좋겠어!” 이런 사랑꾼 같으니라고. 앞으로 이렇게 만나도 정말 진짜 괜찮냐고 재차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어김없이 “예스!”였다. 집으로 돌아와 생얼로 다닌 요 며칠을 되새김질하면서 드는 생각. 그동안 뭐 하러 생얼을 두려워했을까? 생얼로 슈퍼마켓에 가고, 생얼로 출근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누구 하나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데. 그래, 결심했어! 앞으로 피곤해 죽겠는데 잠을 줄여서라도 메이크업하지는 않겠다고. 고작 슈퍼마켓에 가거나 요가하러 가면서 화장에 공들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나는 생얼이어도 충분히 아름답고 멋질 수 있다고 여기면서. 

<엘르> 코리아 뷰티 에디터 천나리 


화장하지 않은 상태로 밖을 나서라는 건 정말이지 너무 심한 아이디어였다. 노 메이크업을 해본 적도 없었고, 시도할 용기조차 없었으니까. 나는 365일 메이크업을 고수하는 타입이다. 심지어 아이를 낳을 때도, 조류독감에 걸렸을 때도, 집에서 일할 때도 화장할 정도다(아마 내가 처음으로 말한 단어는 엄마가 아닌 립글로스일 거다). 심지어 마리오노(프랑스의 대표 뷰티 유통 체인)의 직원은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다. 화장하지 않는 여자 친구들을 보면 그들이 촌스러운 히피족 마인드를 숨기고 있다가 결국 시골로 내려가 평생 양털이나 뜨개질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노래 ‘Girl can’t be herself’를 통해 이를 가장 먼저 공론화하며 노 메이크업 앨범 재킷을 선보인 앨리샤 키스는 메이크업이 가부장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진짜 모습과 사회적인 모습 사이의 격차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에바 롱고리아, 캐머런 디아즈, 기네스 팰트로, 카사디언-제너 자매까지 노 메이크업 운동에 동참하며 인스타그램에 민낯을 공개했다. 어쨌든 미국에서만 유행하는 일이라 치부하고 쭉 마음 편히 있던 차, 프랑스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포착됐다. 내가 사랑하는 사라 포레스티에가 남성들이 규정한 ‘글래머러스’라는 압제에 맞서 잠자리에 들어가기 직전인 듯한 민낯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 더는 선택권이 없는 현실. 확고한 행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가방 속 파우치와 그 안의 메이크업 제품을 딸아이 방문 앞에 선물로 놓았다. “방문 앞에 놓인 이 쓰레기들은 뭐죠?” 배은망덕한 딸 같으니라고. 그러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엄마, 어디 아파? 배탈이라도 났어?” 딸에게 가부장적 사회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대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놀라겠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스누피 티셔츠 얘기를 하는 거야?” 노 메이크업인 얼굴보다 옷이 먼저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용기를 얻어 집을 나섰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목도리와 모자로 얼굴을 감추었고, 경비실 관리인의 옆을 지날 때는 얼굴을 돌리기 위해 전화하는 척, 연기까지 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눈썹 없는 얼굴을 보니 마치 이가 빠진 듯했다. 마주친 25명의 동료 중 8명은 자신의 아이도 몸이 좋지 않아 잠을 못 잤다며 따뜻한 인사를 건넸고(8시간이나 잤는데!), 4명은 나와 거리를 둔 채 멀찌감치 떨어져 지나갔다. 내가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게 분명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뷰티 팀 동료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진정한 나로 살고자 하는 노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얼굴을 정돈해 노 메이크업으로 보일 방법은 없는가에 대해 말이다. 그들이 권한 컨실러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 작업을 시작했다. “배신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필 편집장이 들이닥치다니. 나는 고개를 떨구고 메이크업을 지워냈다. 식당 구석 자리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며 생각했다. ‘다음번 할리우드 유행이 씻지 않는 것이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힘들고 외로운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던 퇴근길. 가부장적 사회를 향한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여성으로서 진정한 나 자신이란 사실 풀 메이크업에 탐스러운 머릿결을 가진 낸시 레이건 같은 모습이 아닐까?’ 결국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딸아이의 방에서 파우치를 되찾았고, 블랙 아이라이너로 날렵한 캐츠 아이를 그렸다. 나는 루저일까? 답은 노(No)! 앞으로 플렉시테리언(Flexiterian, 채식주의 식사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육류나 생선도 먹는 사람)처럼 플렉시 메이크업을 해야지. 나는 공식적으로 낮에만 화장할 것을 선포한다. 밤에는 반드시 맨 얼굴로 피부를 쉬게 해줄 것이다. 맹세한다.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플렉시 메이크업을 하겠노라고. 

프랑스 작가, 알릭스 지로 드 랭(Alix Girod De L'ain)

CREDIT

에디터 천나리
작가 알릭스 지로 드 랭(ALIX GIROD DE L'AIN)
사진 GETTYIMAGESKOREA
디자인 황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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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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