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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0. WED

GENDER FLUID

남녀 경계를 허무는 향

남자 향과 여자 향은 누가 만들어낸 걸까? 전형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양성 또는 중성의 경계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읽었던 책 속의 한 장면. 가르데니아(치자꽃) 향수를 뿌리고 방으로 들어가던 여성의 모습에 취한 주인공의 심리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치 구름 속에서 넋이 나간 듯, 진하고 달콤한 향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20년이 지나 내 옷장 선반 위에는 에스티 로더 프라이빗 컬렉션의 ‘튜베로즈 가드니아 오 드 퍼퓸’이 놓여 있다. 이 향을 딱히 좋아하지 않음에도 굳이 놓아둔 건 우연이 아니라 어릴 적 읽은 바로 그 책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 속 저편 가르데니아 향은 주인공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처럼 우아하고 감미로운 여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니.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나? 가르데니아는 ‘여성’이 아닌 ‘꽃’이다. 장미도, 재스민도 그저 꽃일 뿐이다. 여자 향수에 들어가는 과일, 꽃, 달콤한 향신료 등의 원료도 숲이나 밭에서 자라는 흔한 식물이거나 베이킹의 재료일 뿐 ‘여성성’과 연결될 만한 그 어떤 배경도 없다. 반대로 가죽, 나무와 ‘남성’ 사이의 연결고리도 딱히 없다. 하지만 향수 분야에서 만큼은 그렇다. 적어도 지난 100년간은 그래 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향수를 사용했는데, 흥미로운 건 19세기 이전까지 남녀 향 구분 없이 비슷한 향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여성은 꽃 향기가 나는 향수를, 남성은 우드나 시트러스 향이 나는 향수를 써야 한다는 인식의 틀이 생겨났다. 안타깝게도.


신경학자이자 심리학자로, <욕망의 향: 수수께끼 같은 향기의 감각을 찾아서 The Scent of Desire: Discovering Our Enigmatic Sense of Smell>의 저자인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시대의 남성과 여성이 응당 ‘이래야 한다’는 사회, 문화적 관념과 관련 있습니다. 남자들은 들판에서 험한 일을 하고 여자들은 꽃이나 과일과 밀접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죠. ‘여자아이는 핑크, 남자아이는 블루’라는 고정관념 같은 거예요.” 여자 향, 남자 향을 구분하는 것이 후천적으로 학습된 행동이라는 의견에 <향수: 세기의 향들 Perfume: A Century of Scents>의 저자 리지 오스트롬(Lizzie Ostrom) 역시 동의한다. 그녀에 의하면, 그 옛날 남성들이 향에 탐닉하는 건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위가 아니었다고 한다. “40, 50년대에 들어서야 남자들의 취미로서 향수가 용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위스키, 근사한 자동차, 오래된 서재, 체스, 가죽 의자 등 남자들이 동경하는 ‘폼 나는 귀족적 삶’의 면모에 향을 결합시킨 마케팅의 산물이었죠.” 광고의 파급력을 높이기 위해 따온 모티프들이 곧 멋진 남자를 상징하는 향이 되어 사람들 머릿속에 ‘우드, 가죽, 위스키, 오크 통, 럼주, 담배 = 남자 향기’라는 등식을 각인시켜 버렸다는 설명이다. 헤르츠 박사는 ‘하나의 향수에만 무려 80여 가지가 넘는 성분이 들어가는데 이 중, 우리가 실제 맡는 향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 향에 반응하는 양상 역시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쉬운 예로 샤넬 No.5를 들 수 있다. No.5를 대표하는 성분이 ‘알데하이드’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우리는 알데하이드가 꽃 향인지, 가죽 향인지, 불쾌한 동물의 사체 향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가 인터뷰에서 이 향수를 뿌린 채(나체로) 잔다고 말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로써 샤넬 No.5와 이 향수에 들어 있는 알데하이드에는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가 입혀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향이란 본능적인 것이지 ‘이건 남자 향, 저건 여자 향’으로 해석될 대상 자체는 아니다. 헤르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성에게 끌리는 요인 중 하나로 냄새를 꼽을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외모나 유머 감각보다 냄새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인간의 체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전적 요인을 가시화해서 보여주는 청사진과 같아요. 지극히 생물학적 시각에서 봤을 때, 사랑하는 대상을 찾는 건 곧 내 아이의 잠재적 아빠와 엄마를 찾는 일이거든요. 건강한 자손을 낳을 능력이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체크하는 거죠. 실제 여성들은 자신과 가장 이질적인 유전자를 지닌 남성의 향기에 강하게 이끌린다고 합니다.” 특정 향에 덧입혀진 사회적 성별에서 벗어나 개인마다 각기 다른 체취와 본능에 집중한 대표적인 향수로 이센트릭 몰리큘스(Escentric Molecules)를 들 수 있다. 처음 뿌리는 순간 아무런 향기도 느껴지지 않거나 알코올 냄새만 나는 독특한 향수를 선보이는 니치 브랜드. 베이스, 하트, 톱 노트 순으로 이런저런 향료를 쌓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차적으로 향을 전달하는 일반적인 향수와 달리, 브랜드 명처럼 ‘분자’ 차원에서 작용하여 체취와 섞이면서 발향된다. 같은 향수를 사용해도 각자의 체취와 섞여 다른 향이 나기 때문에 오롯이 ‘나만의 향수’가 된다. 런던 리버티 백화점에서 단연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비욘세, 리한나, 휴 잭맨, 엘튼 존 등 어마어마한 셀러브리티 마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린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결국 어떤 향수나 특정 향에 애착을 갖는다는 건 그 향수가 여성미로 가득하거나 남성미로 충만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내가 직관적으로 끌리고, 나만의 체취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향이라는 걸 본능적인 후각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바이레도에서 ‘언네임드(Unnamed)’라는 향수를 내놓은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 향수를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정보는 향수의 이름과 어떤 노트로 구성됐는지다. 이를 통해 어떤 향을 낼지 추론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시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에 특정 이미지로 이 향수를 재단해 버리게 된다. 바이레도는 불친절하다는 불평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주 사소한 힌트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이 알아서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 남자 향수인지 여자 향수인지 남녀 같이 쓰는 향인지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개개인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란 전부 다른 것이니까.


리지 오스트롬은 최근 유니섹스 향수 시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성별로 구분하지 않는 젠더프리(Gender-free) 향수는 우리가 왜 향수를 사용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죠. 좀 더 비판적이고 의식적으로 취향에 맞게 향을 ‘즐기자는’ 거예요. 성별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그저 후각이 이끌리는 대로 향을 자유로이 선택해 즐기면 그만인 거예요.” 기존 관습을 거부하는 것이 곧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은 더 이상 과일 향, 꽃 향을 뿌리지 않는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난 여자지만 흔한 플로럴 향수를 쓰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 ‘페미니즘 트렌드에 맞게 여자 향수 대신 남자 향수를 쓸래’ 따위의 이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남녀를 양분하는 구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향에는 남자 여자가 따로 없고 그저 본능이 이끄는 호불호만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 성별로 개개인을 틀에 가두는 세상은 이제 지나갔고 젠더프리 향수의 대두가 이런 변화를 대변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남녀 경계가 허물어진 향의 세계로 탐험을 떠날 때다.



Gender-free fragrances


꽃 같기도 가죽 같기도! 상반된 느낌의 향이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는 갈로 데르메스, 34만원대, 50ml, Hermes.


비가 내린 뒤의 신선한 물 향. 마크 제이콥스 레인, 100ml 8만원, Marc Jacobs.


원초적이면서도 독특한 오리엔탈 향을 뿜어내는 마라케시 인텐스, 50ml 9만5천원, Ae-sop.


조향사 올리비에 폴주가 여성의 피부에 남은 남성의 흔적을 상상하며 만든 향. 레 엑스클루시브 드 샤넬 컬렉션 오 드 빠르펭 보이 샤넬, 75ml 28만원, Chanel.


벨벳처럼 부드럽고 코코넛 워터처럼 따스한 달콤함. 벨벳 헤이즈, 100ml 29만원, Byredo.


말보로 맨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까슬까슬한 건초 같은 느낌의 향. 상탈 33, 100ml 34만5천원, Le Labo.


화이트 머스크와 네롤리가 만난 가벼운 코롱. 상쾌하면서도 투명한 느낌의 꼴론 앙델레빌, 50ml 21만원,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쌉싸래한 담배 잎과 달달한 바닐라가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없다. 토바코 바닐, 50ml 29만5천원, Tom Ford Beauty.


센 강변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과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마법 같은 파리의 밤을 표현한 그랑 수와, 200ml 41만원, Maison Francis Kurkdjian.


묵직하게 퍼져 나가는 크리미한 머스크 향으로 열정적인 이탤리언을 연상시킨다. 아쿠아 디 콜로니아 무스치오 오로, 100ml 17만8천원, Santa Maria Novella.


90년대 유니섹스 컨셉트의 향수를 선보인 CK에서 다시금 선보인 젠더프리 향. CK 올, 100ml 7만3천원, Calvin Klein.

CREDIT

사진 CHRISTOPHER SCHOONOVER, JONATHAN SCHOONOVER
글 ALICE WIGNALL
사진 전성곤
에디터 정윤지
번역 권태경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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