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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1. SUN

GOD CREATED ALAIA

알라이아의 여정

지난 11월 18일, 이 시대의 마지막 쿠튀리에로 불렸던 아제딘 알라이아가 77년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브 생 로랑이 여성에게 권력을 주었다면 아제딘은 여성이 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여성들이 오버사이즈와 유니섹스 시대를 지나 옷 속에 감춰진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시대가 왔다.” 로랑스 베나임이 전하는 아제딘 알라이아에 관한 설명이다. 이브 생 로랑의 전기 작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알라이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쿠튀리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알라이아의 바벨탑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무시(Moussy) 거리가 보이는 마레 한복판에 5000㎡ 규모의 알라이아 쇼룸이 있었다. 그곳은 비밀과 웃음, 분노가 혼재하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재미있는 일이 종종 벌어지던 그의 부엌에서 수없이 많은 식사를 했다. 반짝이는 레드 컬러의 베르켈(Berkel) 햄 슬라이서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세인트 버나드 종인 알라이아 반려견 디딘의 매트가 깔려 있던 친밀한 공간. 식탁에는 클레(Cler) 거리에 있는 해산물 가게, 라 사블레즈(La Sablaise; 엘리제 궁에도 납품하는 업체)에서 매일 배달되는 가자미와 서대기, 하리사(Harissa) 페이스트, 토스카나산 올리브오일, 아코팔(Arcopal) 유리잔이 세팅돼 있었다. 그곳은 그의 작업실이지만 모두를 위한 집이기도 했다. 그를 찾는 단골손님들,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클라이언트들, 유명한 작가, 나오미 캠벨 같은 톱 모델 그리고 여가수들(그에게 강아지를 준 샤키라와 비욘세가 매니저 없이 앉아 있었다)이 자신의 집처럼 편한 시간을 보냈다. 1950년대에 돈 한 푼 없이 파리로 넘어와 데뷔한 그에게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라고 묻자 그의 절친인 카를라 소차니는 로랑스 베나임에게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부엌 크기요!” 튀니지 농부 이스마엘 벤 알라이아의 아들인 아제딘은 여기에 덧붙여 말했다. “자신의 출신이 어디인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튀니지에서 자란 알라이아는 튀니지와 프랑스, 이중국적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은 그의 패션에 대해 동양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알라이아는 사람들에게 동양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과 풍자를 알리려 했다. 그는 싸구려 같고 키치하다는 식민지적 시각에서 벗어나려 했다.

알라이아가 태어난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미지는 노트르담드시온(Notre-Dame-de-Sion)의 수녀들과 수녀가 쓴 모자, 흰색 베일이다. 알라이아의 패션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는가 간결하고 엄격한 알라이아의 감각은 그가 오랜 시간 지켜봤던 수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베르트 수녀에게 그려준 첫 번째 데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완벽한 상태로 풀을 먹여 만든 그의 포플린 셔츠를 보면 수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수녀복의 실루엣이 보기 좋았다. 수녀들은 납작한 샌들만 신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손과 발이 매끄러운 것만으로도…”라고 알라이아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라이아의 옷을 언급하며 여성의 보디라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엉덩이와 가슴 디자인을 지적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그의 관능적인 디자인은 순수한 에로티시즘을 담은 미학이다. 그 자신과 몸 사이에는 신비한 에로티시즘이 흐른다. 그는 금욕적인 자세로 옷을 만들고 해체하고, 다시 만드는 반복 과정을 통해 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수녀의 매끈한 손은 그가 드레스 위에 한껏 고양시킨 모래 컬러의 원형이다.

당신의 책을 보면 여성들이 ‘사랑의 탄약을 찾으러’ 알라이아 부티크에 온다고 했다. 알라이아 역시 자신의 옷이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가꾸도록 만든다”고 말했는데, 여성의 곡선을 강조하는 디자인은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고착화하는 것 아닌가 그건 상투적인 결론이다. 사람들은 그의 부티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재킷과 가장 아름다운 셔츠, 가장 아름다운 바지를 찾았다. 그를 통해 장인 정신을 가진 재단사의 섬세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영국식으로 말하면 정교한 테일러링이다. 사람들은 유독 쿠튀리에가 보디라인을 살린 디자인, 잘 늘어나는 드레스, 미니스커트, 섹시미 등을 내세우길 원했다. 알라이아는 소니아 리키엘처럼 여성 사이에서 바지가 평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패션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다리가 예쁘지 않은 여성에게 더욱 유효한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알라이아 하우스는 상업적으로 모든 몸을 조각할 수 있는 ‘룩(Look)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레드 카펫에서 알라이아 드레스를 입은 셀러브리티들이 그의 명성이 드러나도록 부각시켜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알라이아의 진짜 힘은 누구보다 탁월한 라인 감각이다.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가죽 블루종과 프록 코트, 트렌치코트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반전 매력처럼 앞모습은 엄숙하고 절제돼 있지만, 등이 과감하게 드러나는 베어 백 드레스를 만들어내는 재주도 매우 뛰어났다.

끊임없이 패션계의 공식 캘린더를 규탄했던 그는 모든 쇼가 끝난 두 달 뒤에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는 어떻게 강박적인 규칙에 사로잡힌 패션계가 자신의 리듬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나 사실 그는 쇼를 위한 초대장도 만들지 않았고 쇼 현장을 촬영하기 위한 포토그래퍼도 섭외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프레젠테이션을 단독으로 기획하고 진행했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천천히 집중하며 컬렉션을 완성했다. 쇼를 위해 매일 일하는 디자이너였지만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정해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쇼를 열기 석 달 전부터 부산스럽게 일을 시작했다. 알라이아는 “우리는 준비가 되면 판매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공간에서는 어떤 곳보다 계절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포플린을, 겨울에는 럭셔리한 베스트를 만들었다.

이집트 여가수 움 칼숨(Oum Kalthoum)을 좋아해서 밤늦게까지 콘서트 재방송을 볼 정도였다고 이건 그의 젊은 시절에 있었던 추억에 관한 기록이다. 그 시절 움 칼숨은 매달 첫 번째 목요일마다 튀니지 라디오에 출연하는 스타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자유와 환상, 즐거움, 움직임, 동양에서 꿈꾸는 서양을 구현해 내는 존재였다. 생 로랑에게 칼라스가 있었다면 알라이아에게는 움 칼숨의 노래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의 향수를 자극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는 유혹과 거만, 장난이 특별하게 버무려진 사람이었다. 딱 알라이아처럼.


드레스를 손질하고 있는 알라이아의 모습을  앙드레 로우(Andre Rau)가 포착했다.


1984년 <엘르> 프랑스에 실린 마크 히스파드(Marc Hispard) 사진에서 블랙 룩의 관능미가 느껴진다.


한스 페러(Hans Feurer) 의 사진 속에 담긴 신디 크로퍼드의 건강미.





ADIEU TO THE MASTER

그의 뮤즈와 친구들이 작은 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ANNE-MARIE PERIER <ELLE>
전 편집장 “나는 미셸 사르두(Michel Sardou; 프랑스 가수이자 배우)와 그의 집에서 결혼했다. 색다르고 멋진 밤이었다. 알라이아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직접 다림질을 하거나 핀을 꽂고 있었다.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전화로 농담하길  좋아하고, 때론 다른 사람인 척 흉내도 냈던 인간미 넘치는 디자이너. 아틀리에에서 아를레티가 나오는 영화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밤에 혼자 일하곤 했다. 그만의 세계가 분명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세계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많이 그리울 것이다.”


GRACE JONES 가수

“너무 슬퍼서 멋진 순간만 기억하고 싶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많았다. 알라이아는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나도 그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가장 눈부신 옷을 안겨준 디자이너. 1985년, 알라이아는 프랑스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 상’과 ‘올해 최고의 컬렉션’을 수상했다. 오페라에서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을 노래할 때 입은 드레스는 그가 나를 위해 만든 옷이다. 알라이아는 자신의 작업 방식대로 나한테 드레스를 입힌 채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온종일 서 있었다. 그런데 옷이 완성된 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 ‘타이트’했다!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약혼자 돌프 룬드그렌이 팔로 나를 받쳐주었다. 정말 굉장한 밤이었다! 그때 알라이아는 정말 기뻐했다. 2년이 지난 뒤 방송에 출연할 때 나는 내 팔에 아제딘을 받치고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런더 이제 더 이상 그를 내 팔에 안을 수 없게 됐다.”


CHUNG HWA KYUNG 신세계 상무 

“아제딘 알라이아와 함께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마레의 알라이아 플래그십 스토어 뒤편에 마련된 오픈 키친과 다이닝 룸에서 그와 나눴던 식사. 알라이아는 지인을 모아 식사를 대접하고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디자이너로 추억된다. 거물급 패션계 인사나 신예 모델, 셀러브리티들이 명예나 권위 의식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혹은 오랜 친구처럼 올망졸망 모여 앉아 소박하게 준비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란! 많은 이들에게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순간이다. 그런데 당시, 패션업계에 막 발을 내디딘 내가 그와 따뜻한 식사 한 끼를 함께했으니 꿈에서만 가능한 일이 현실로 다가온 거다. 앞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아제딘을 받치고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그는 정말 천재였다. 작은 천재. 우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란 말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를 내 팔에 안을 수 없게 됐다.”


OLIVIER SAILLARD 패션 큐레이터

“패션사에 마담 그레, 비오네, 발렌시아가 그리고 알라이아로 이어지는 계보가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반복하는 비범한 재주를 지녔는데 이는 새로운 걸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옷을 완벽하게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손질하고 끝까지 재단한다. 그 결과물은 언제나 놀랍고 감탄할 만하다. 그는 쿠튀르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디자이너로 패션 컬렉터이기도 했다. 그만의 비범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운 좋게도 2013년,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을 때 나는 아제딘 알라이아의 놀라운 인생 스토리를 세밀하게 들을 수 있었다.”


JEAN-PAUL GOUDE 사진가

“알라이아를 만나자마자 그의 매력에 빠졌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자신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점이었다. 튀니지 사람이 파리 스타일을 좇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까. 1980년대에 우리는 모델 파리다 켈파(Farida Khelfa)와 많은 일을 했다. 그때 함께한 작업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때론 어린아이 같은 면을 내보일 때가 있었는데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미장센으로 그가 들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쿵짝’이 잘 맞는 초등학생 같았다. 딱 한 번 심하게 싸운 적도 있었다. 나는 그가 튈르리 정원에 있는 가스통 라셰즈(Gaston Lachaise)의 조각에 리본을 달았으면 했지만 그는 이런 나를 반박했다. “아니야. 라셰즈가 아니라 아리스티드 마욜(Aristide Maillol)이 만든 조각 위에 옷을 입히고 싶다고!”

CREDIT

글 KATELL POULIQUEN, SOLINE DELOS, NATHALIE DUPUIS, SYLVIA JORIF, MARION RUGGIER
사진 BENSIMON GILLES,PERIER JEAN MARIE, MONDINO JEAN-BAPTISTE, MAGNI TIZIANO, GETTYIMAGESKOREA, KIM S.GON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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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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