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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MON

GREAT EXPECTATIONS

패션 음유시인

100번의 컬렉션을 펼쳐 보인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이 두 권의 책 속에 그간의 아카이브를 소환했다. 그의 네버엔딩 스토리


벨기에 앤트워프에 자리 잡은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의 아틀리에에 들어서면 시간을 초월한 듯 그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 펼쳐진다. 그의 취향대로 완벽히 정돈된 인테리어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자 고요하면서 강인한 공기가 실내를 맴돈다. 흡사 왕좌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나무 서랍장을 배경으로 만개한 달리아 꽃이 놓인 긴 테이블과 앤티크한 오브제들로 둘러싸인, 영감의 원천으로 가득한 바로 이곳에서 100번에 달하는 드리스 반 노튼의 컬렉션이 탄생했다.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풍스러운 작업실에서 차근차근 쌓아 올린 자신의 커리어를 두 권의 자서전에 응집했다. 책은 컬렉션 영감과 쇼장의 베뉴, 사운드트랙은 물론 어디서도 공개하지 않았던 자료와 기록들을 총망라한다. 패션 도록과 같은 책장을 한 장씩 넘기다 보면 그가 1980년대 후반 패션계에 존재감을 드러낸 일명 ‘앤트워프 6’ 컬렉션에서 파리 패션위크의 중심에 선 지금까지의 연대기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그럼에도 지극히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며 무한한 색감과 완벽한 자수를 만들어 내려는 열망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언제나 간결한 모노톤 의상을 입은 채 차분하고 정중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는 지금도 반 노튼은 끊임없이 미래를 그리고 있다.




THE FIRST MOMENT

1994년, 내 이름을 건 첫 번째 여성복 컬렉션이 열렸다. 당시 예산이 부족했던 우리로서는 묘책이 필요했다. 의자 대신 푹신한 매트리스와 쿠션을 잔뜩 빌려 쇼 장소로 선택한 파리의 호텔 조르주5 (GeorgeⅤ) 홀 바닥을 뒤덮었다. 이 모든 게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쇼장 입구에서 인비테이션을 나눠주며 시간을 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묘책이 컬렉션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 대관료는 저렴했지만 호텔에 핑거 푸드를 주문해야 했기에 케이터링 비용으로 큰 돈을 지불했다는 사실!




BEHIND THE CITY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산책 마니아다. 한가로이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도 일의 중요한 일부다. 6개월마다 열리는 컬렉션을 위해 테마에 어울리는 특별한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파리의 스폿은 뷔트 쇼몽 공원(Parc des Buttes Chaumont)에서 발견한 근사한 동굴과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 극장의 백스테이지, 그리고 아직 직접 가진 않았지만 택시를 타고 시뉴(Cygne) 섬의 강둑을 따라가다 마주한 작은 길도 좋았다. 예전엔 팔레 루아얄(Palais-royal)의 안뜰과 자크마 앙드레 뮤지엄(Muse′e Jacquemart-Andre′)에서 쇼를 여는 꿈을 꿨지만 당시엔 대부분 허용되지 않았다. 특별한 쇼 장소를 발견하는 일은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겐 늘 행운이 따른다.




ADVENTURE IN INDIA

1980년대부터 나는 인도 문화에 사로잡혔다. 사리, 자수, 옷감…. 스카프를 만들기 위해 인도 장인들에게 연락한 적도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쌓아온 자신들의 노하우를 선뜻 전수해 주었고 나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인도 사람들은 형광색처럼 밝고 활기 넘치는 컬러를 좋아한다. 초반엔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에스닉한 영감으로 시작했다면 날염 기법, 이국적인 패턴의 실크, 골드 등을 접목시키며 점차 진화했다. 나는 인도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고 1996년엔 발리우드로 발을 들였다. 늘 내가 만든 아름다움의 기준을 깨기 위해 노력한다. 수공업을 고집하는 내가 리옹이나 스코틀랜드의 수공업 장인들을 찾아 함께 일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아틀리에에서도 스코틀랜드 셰틀랜드 (Shetlands)에서 생산한 모직으로 만든 오브제들을 찾을 수 있다. 내 작업에서 보여지는 자수 역시 3000명의 인도 장인들과의 작업에서 탄생한 것이다. 물론 편하게 보이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충분한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판매수익을 내야 하는 브랜드의 수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SHADES OF BACON

68번째 컬렉션은 다른 컬렉션과는 좀 다르다. 런던에서 작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전시를 감상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작품 속 색감의 조화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의 작품에 미치도록 빠져들었다. 일종의 ‘스탕달 증후군(뛰어난 예술 작품을 보고 극도의 흥분이나 쇼크를 느끼는 심리학적 증상)’이랄까.
나를 울린 그 깊은 감동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보이는 형용할 수 없는 색감들(자홍색, 빨간색, 살색 등이 뒤섞인 색)을 패브릭에 표현하기 위해 완벽한 방법을 찾는 일은 정말 놀라운 작업이었다. 쇼에 대한 반응은 뒤섞였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 컬러들이 런웨이를 아름답게 물들였음은 틀림없다. 만약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오마주한 컬렉션이 없었다면 다음 컬렉션에 무엇이 존재했을지 상상이 안 된다. 이 컬렉션을 거치면서 디자인의 기준이 달라졌다. 스스로에게 몰두할 수 있는 내겐 혁신과도 같은 성공이었다.




FROM 50 TO 101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긴 디너 테이블로 50번째 쇼를 기념했다면 100번째 쇼는 완벽히 ‘단순한 것’에 중점을 뒀다.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것들을 걷어내고 오직 ‘옷’의 본질에 집중했다. 다채로운 프린트와 퀼팅 등을 활용한 아이코닉한 소재 개발은 물론 전설적인 슈퍼모델 나디아 아우어만, 크리스틴 오웬, 트리시 고프, 앰버 발레타 등 그동안 내 컬렉션 무대에 올랐던 모델 수십 명을 캐스팅해 기념비적인 런웨이에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20~30대 시절을 회상하면 컬렉션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과거 패션 저널리스트들은 저마다 수첩을 들고 디자인에 대한 리뷰를 써내려 갔다. 50번째 쇼에 처음으로 소형 카메라가 등장하더니 이후 62번째엔 스마트폰으로 쇼를 촬영해 실시간으로 쇼의 모든 것을 전송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 그간 지켜본 변화의 흐름은 미래를 내다보는 척도가 될 것이다. 100번의 쇼를 마친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챕터’ 앞에 섰다. 파리의 신문사 <리베라시옹 Libe?ration> 오피스에서 선보인 2018 S/S 남성복, 지난 9월에 열린 여성복까지 숨 가쁘게 두 번의 컬렉션을 더 열었다. 이번 테마는 열린 사고방식과 영향력을 지닌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런 여자. 늘 그렇듯 근본을 바꾸기보다 다양한 분야를 과감히 시도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천천히 진일보하고 싶다.



MAKE OBSESSION

컬렉션을 거듭할수록 내가 무엇에 집착하는지 깨달았다. 단 하나, 바로 ‘셔츠’다. 베이식한 화이트 셔츠에서 자수, 소재, 컬러, 사이즈에 이르기까지 모든 각도에 걸쳐 셔츠를 디자인하고 연구했다. 누구나 알 만한 클래식한 블레이저나 유니폼, 밀리터리 요소 역시 셔츠의 다양성을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자극하는 것은 바로 소재다. 셔츠를 비롯해 모든 컬렉션 피스엔 소재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FULL BLOOM

오래전부터 품어온 ‘정원’에 대한 로망 덕분에 현재 근사한 정원을 소유하고 있다. 꽤 크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비밀스러운 정원에 있으면 저절로 맨발로 거닐게 된다. 우리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템포가 있는 패션계와는 달리 이곳에선 흘러가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긴다. 비가 오면 잔디를 깎고, 건조해지면 물을 준다. 그리고 꽃 피는 시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요즘 같은 겨울엔 녹색 식물인 하마멜리스 속에서 작고 노란 꽃망울이 피는데 의외로 강한 오렌지 향을 풍기며 온 정원을 휘감는다. 2월 즈음엔 <그리스 신화> 속의 샤프란 꽃으로 잘 알려진 크로커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봄이 되면 진달래와 장미, 달리아 꽃이 속속 피어난다. 가을엔 시클라멘과 푸크시아가 정원을 수놓는다. 나의 집과 아틀리에 어디에서든 만개한 꽃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모두 내 정원에서 가져온 것이다. 꽃은 내 작업에서 없어선 안 될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CREDIT

글 SYLVIA JORIF
에디터 방호광
사진 PINHEIRO FE, PATRICE STABLE, IMAXTREE.COM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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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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