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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4. THU

SUPER LEGEND

언니는 살아 있다

90년대 원조 슈퍼모델들이 밀레니얼 시대로 귀환했다

 

최근 하이패션 모델의 조건은 완벽한 보디라인과 육감적인 눈빛, 탐스러운 머릿결을 휘날리며 걷는 캐츠 워킹이 아닌 인스타그램의 팔로어 수. SNS에서 얼마나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느냐가 중요 요건이 됐다. 그리하여 지지와 벨라 하디드 자매를 필두로 켄덜 제너, 헤일리 볼드윈 등 어마어마한 팔로어를 거느린 슈퍼스타 톱 모델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한 시즌의 여러 하이엔드 브랜드의 캠페인 모델에 동시다발로 캐스팅되는가 하면, 전 세계 하이패션 매거진의 커버를 앞다퉈 촬영하기도 한다. 어마어마한 몸값에도 그녀들을 찾는 패션 월드의 수요는 끊이지 않는다. 런웨이도 마찬가지. 빅 하우스 브랜드는 셀럽 모델을 모시기 급급해 수많은 빅 쇼에 밀레니얼 톱 모델 군단을 내세워 ‘우리 지지, 우리 벨라’를 외치게 만들었다(그런 면에서 자신의 쇼에 세울 모든 모델을 익스클루시브 조건으로 고집스럽게 캐스팅하는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정책은 박수 칠 만하다). 빅 하우스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패션계는 물론 대중까지 너무 많이 소비된 그들의 뻔한 이미지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한두 시즌 반짝 인기일 줄 알았으나, 그들만큼 파급력을 지닌 슈퍼모델들이 더 이상 탄생하지 않는 것이 문제. 나이 지긋한 시니어 모델이나 히잡을 두른 할리마 아덴, 버즈 컷의 루스 벨, 플러스 사이즈의 애슐리 그레이엄, 가나계 영국 출신의 애드와 아보아, 슬릭 우즈 등 소셜 미디어에서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새로운 캐스팅은 잠시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긴 했지만, 패션 메이저급 모델의 등장으로 보기엔 역부족이다. 사실 90년대에 ‘슈퍼모델’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신디 크로퍼드와 클라우디아 시퍼를 비롯해 나디아 아우어만, 크리스티 털링턴, 에바 헤르지고바 등 전설적인 모델에 비하면 밀레니얼 톱 모델들의 활동은 다소 아쉽게만 느껴진다. 거대한 웨이브 헤어에 새빨간 레블론 립스틱을 요염하게 바르던 신디 크로퍼드나 클라우디아 시퍼의 고전적이고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부메랑 앱의 가벼운 움짤에 ‘좋아요’를 더 많이 받는 것이 중요한 시대니. 이런 패션계의 간절한 목마름과 염원이 통한 걸까? 지난 밀란 컬렉션에서 믿기지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서울에서 밀란 컬렉션을 위해 떠나기 전, 베르사체 홍보 팀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컬렉션은 굉장히 중요한 쇼가 될 테니 꼭 참석 부탁드릴게요.” 한 통도 아닌 수차례 연락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의구심을 가득 품은 채 쇼장에 도착했다. 굉장히 스페셜한 쇼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규모는 평소보다 작아지고 특별하게 스펙터클한 무대장치조차 없는, 정말 ‘평범한 쇼장’이라 놀라긴 했다. 모든 좌석에는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정리한 위대한 유산 타블로이드가 놓여 있을 뿐. 쇼는 예상대로 도나텔라가 지아니를 추억하며 그에게 헌정한 ‘지아니 베르사체’였다. 역시 도나텔라의 뮤즈인 지지와 벨라를 비롯해 베르사체 군단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캔디스 스와네플, 두첸 크로스, 애나 이버스, 카이아 거버, 카라 테일러 등 톱 모델들이 총출동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한 쇼임에 분명했지만, 진짜는 피날레 이후부터였다. 잠시 암전된 후, 무대 위의 커튼이 열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Gianni, This is for you’가 울려퍼지자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5명의 모델이 황홀한 자태로 등장한 것! 처음엔 어둠속에서 빛나는 골든 드레스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조명이 켜지자 쇼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90년대 지아니 베르사체가 디자인한 메탈 드레스를 입은 카를라 브루니, 클라우디아 시퍼, 나오미 캠벨, 신디 크로퍼드, 헬레나 크리스텐센까지! 그때 그 시절 지아니의 뮤즈 5명이 등장한 것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내려와 도나텔라와 함께 런웨이를 걷는 순간 모든 관객은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고, 그 순간은 스마트폰에 담기 위한 취재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5명의 슈퍼모델 역시 이런 환호와 무대 위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그처럼 파워플한 에너지와 열정으로 가득한 쇼는 최근 그 어떤 쇼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비단 에디터만 느낀 감정은 아니었던 듯, 쇼가 끝난 후 SNS 피드에는 온통 ‘돌아온 슈퍼모델’ ‘메이저 골든 걸’ 등 그녀들의 이야기로 넘쳐났다. 가끔 나오미 캠벨 정도만 친분 있는 디자이너의 런웨이에서 목격됐을 뿐 지아니의 뮤즈들이 그처럼 동시에 런웨이에 오를 일은 앞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날의 모멘트는 패션계의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쇼가 끝난 후 5인의 슈퍼모델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30주년을 맞이한 클라우디아 시퍼는 리졸리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발행하는 한편 자신의 이름을 건 메이크업 라인까지 론칭했다. 또 슈즈 브랜드 아쿠아주라(Aquazzura)와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는 등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성기 때부터 클라우디아와 라이벌 관계였던 신디 크로퍼드 역시 리던(Re/Done)과 손잡고 ‘더 크로퍼드’ 라인을 선보이며 마치 90년대 펩시콜라 광고 속에서 튀어나올 법한 룩북을 공개했는데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뉴 루키로 떠오른 딸 카이아 거버와 함께 모녀가 패션지 커버를 장식하는가 하면, 카이아와 프레슬리 거버와 함께 오메가의 새로운 패밀리 뮤즈로 떠올라 피터 린드버그의 피사체가 됐다. 또 나오미 캠벨은 2018 피렐리 달력 모델에 등장해 팀 워커와 작업했고, 칸에서 호스트가 되어 자선 패션쇼를 개최하는 등 패션계의 큰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헬레나 크리스텐센은 향수와 란제리 등에서 다양한 협업 활동을 펼치고 있고, 그녀의 조카 올리버 손(Oliver Sonne)을 패션계에 입문케 해 로에베 캠페인과 패션 매거진 커버 모델 데뷔를 성사시킨 숨은 조력자 역할을 했다(물론 그의 외모도 출중하다). 영부인에서 다시 가수로 돌아온 카를라 브루니까지 새 앨범 <프렌치 터치>를 발표하고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우리 가슴속에 묻어놓았던 전설 속의 그녀들이 다시 한 번 패션계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레전드로서!

CREDIT

에디터 방호광
사진 IMAXTREE.COM, GETTYIMAGESKOREA, REX FEATURES
디자인 박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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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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