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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2. WED

GOOD BYE, MR. LOVE

피에르 베르제의 마지막 인사

1992년 11월, <엘르> 코리아 창간호에는 이브 생 로랑의 하우스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창간 25주년을 맞은 지금, 다시 무슈 생 로랑을 이야기하려 한다

젊은 시절의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모습.



피에르 베르제가 드레스를 피팅 중인 모델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1999년).



<엘르> 창간호에 실린 생 로랑의 창립 30주년 기사.




“저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매우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마땅히 알리고 싶고요. 그것이 제 의무이기도 합니다.”


예술과 패션, 문화를 사랑했던 사람, 이브 생 로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를 사랑했던 사람, 성공한 사업가이자 후원자였던 피에르 베르제. 그가 지난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아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영혼의 짝이 있는 곳으로. 그가 돌아간 날은 이브 생 로랑을 추억하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두 개의 박물관 오프닝을 불과 몇 주 앞둔 가을날이었다. 그를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을 사랑했던 예술 애호가, 예술가들의 위대한 재능을 발견하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인 이브 생 로랑의 파트너이자 공동설립자. 그는 자신의 삶을 ‘모험 소설’ 혹은 ‘꽉 찬 삶’이라고 요약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마저 스스로 통제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완성한 두 박물관의 오픈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 그를 보며 어떤 이들은 운명이 그의 손을 잡아 이끈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 언뜻 보면 운명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그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조차 그 자신의 결정이었으리라 입을 모아 말한다. 두 박물관의 미래를 확신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염려할 것도 없었고,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오프닝 세레모니에 몰려든 전 세계의 인파 속에서 쇠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박물관 완성이라는 업적을 마치는 것으로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렇게 떠나는 방식이야말로 그가 이브 생 로랑과 함께했던 시간들, 지극히 소설적인 삶의 결말에 어울리지 않았을까. 피에르 베르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생 로랑과 함께 나누는 데 바쳤다. 베르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공 가운데에는 그가 존중했던 사람들이 있다. 화가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 소설가 장 지오노(Jean Giono),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장 콕토(Jean Cocteau) 그리고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등이 그들. 베르제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특별한 눈을 갖고 있었다. 알아볼 뿐 아니라 그들의 가치를 높이 사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힘써 싸웠다. 예술가들을 향한 그의 충직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다양한 문제들을 근심했다. 에이즈 퇴치와 인종 차별과 싸우는 문제, 동성연애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 정교 분리 원칙을 보존하는 문제, 패션 학교인 IFM(Institut Francais de la Mode)을 창립해 스스로 추구한 패션의 민주화, 프랑스 문화를 널리 전파하는 등 평생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그를 괴롭혔고, 끊임없이 그것들과 싸웠다. 프랑스의 시골, 샤랑트 마리팀(Charente-Maritime)의 올레론 섬에서 태어나 빈손으로 파리에 온 작은 소년, 그가 이토록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알게 되고, 정의를 위해 싸워왔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여정인가! 베르제, 프랑스어로 ‘목자’라는 뜻의 이름을 갖고 태어난 남자. 운명이었을까? 그는 ‘후손에게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열정을 다 바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것들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에 관해 그는 ‘보호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나는 사람들 뒤에서 일할 줄 알아요. 어떻게 하면 그들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죠. 절대 실수하지 않고요. 그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베르제와 함께 일해온 변호사 에마뉘엘 피에라(Emmanuel Pierrat)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했던 일련의 행동은 모두 서로 관련이 있어요. 패션과 예술, 정치, 사교 활동까지 모든 것이 말이죠. 각각의 활동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빈틈없이 서로를 뒷받침해요. 재정적으로 돕거나 명성으로 빛나게 하는 식으로 말이죠. 피에르 베르제는 혼자 이 엄청난 것을 이룬 사람이에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활동 한가운데에 다른 것이 아닌 그의 진심, 신념이 있었어요. 그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만 투자했어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전달하려는 뿌리 깊은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대개 감정적으로 뜨겁다. 우리는 그의 열정, 그가 했던 단호한 말들, 그가 간혹 보였던 호메로스풍의 엄청난 분노, 트위터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감정적 메시지 등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에르 베르제와 가까이 지냈던 패션 컨설턴트 장 자크 피카르(Jean Jacques Picart)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후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어요. 말만으로 후한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죠. 우리는 매번 그의 행동을 통해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좌파 백만장자’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그를 포장했지만, 그 명칭 안에는 고귀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왜냐하면 그는 절대 인색하지도 않았고 이기주의자도 아니었거든요. 그가 가진 대부분의 에너지는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문제가 아닌, 그가 진정으로 싸우고 있는 사회 문제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사업가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의 원동력은 돈이 아니었어요. 진심 어린 신념이 그를 움직이게 했죠.” 피에르 베르제는 지난 7월 말, <엘르> 프랑스와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매우 뚜렷한 신념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제 신념을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제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비록 그것이 제가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문제라 할지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어보죠. 사람들은 저를 동성연애자들의 합법적인 결혼 승인을 위한 캠페인의 대표 주자로 내세웠어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생각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동성연애자들이 이성애자 커플의 방식을 흉내 내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동의한 부분도 있었죠. 그들이 평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고,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그 요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행운이었다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의무도 있는 법이죠.”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영원히 연결된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이 함께한 환상적인 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 시, 창조, 성공, 열정 그리고 차이점, 파란만장함, 위험, 슬픔, 존경과 찬미!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1961년에 설립한 패션 하우스는 어마어마한 패션 제국이 되었고, 두 사람의 삶과 작품은 여전히 많은 이에게 영감을 준다. 전기작가, 소설가, 기자, 영화감독들에게 끊임없이 풍요로운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피에라는 다시 말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배치하길 원했어요. 자신의 재산이 완벽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말이죠. 소장하고 있던 아트 컬렉션과 책을 판매하는 것부터 시작해 재산을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잊을 수 없어요. 매 순간 매우 결정적이고 강렬했거든요.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견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박물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살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어요.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죠.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기 전에는 그가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그는 마침내 박물관을 완성했어요. 이 두 개의 박물관은 이브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제스처라고 할 수 있어요.” 두 사람의 사랑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피에르 베르제가 지난 2008년, 이브 생 로랑의 장례식장에서 작별의 노래로 선정한 자크 브렐(Jacques Brel)의 ‘그리운 오랜 연인들의 노래(La chanson des vieux amants)’ 가사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에게는 폭풍의 날도 있었지요. 20년의 사랑, 그것은 미친 사랑이었어요” ‘이 미친 사랑’(C’est l’amour fol)이야말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이다. 베르제는 이 노래로 먼저 하늘로 간 이브에게 약속의 말을 전했다. “난 알아. 언젠가 모로코의 야자나무 아래로 너를 만나러 갈 거야”라고. 파리 16구의 마르소가 5번지, 이브 생 로랑 박물관 앞에는 YSL 로고가 빛나고 있다. 베르제가 이브에게 작별을 노래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던 곳, 모로코의 마라케시에도 이브 생 로랑을 위한 박물관이 세워졌다. 베르제의 약속처럼 그곳 어딘가 야자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을까? 분명한 것은 피에르 베르제는 두 박물관을 통해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이브 생 로랑과 함께하는 그의 새로운 모험이 다시 시작됐다는 것이다.

CREDIT

컨트리뷰팅 에디터 채은미
사진 MAGNUM PHOTOS/GETTYIMAGESKOREA
디자인 오주희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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