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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SUN

WOMEN'S ATTITUDES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디올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이자 참신한 관점으로 하우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그녀가 전하는 패션과 스타일 그리고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


야외 테라스까지 만석을 이룬 파리 시내의 인기 레스토랑 라브뉴(L’Avenue). 영롱하게 빛나는 샴페인 잔을 들고 매력적인 스타일을 뽐내는 여성들 사이로 온갖 빅 브랜드의 핸드백들이 주인의 자리에서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골드와 실버 체인으로 휘감긴 세련된 로고의 가죽 가방들은 마치 햇살이 내리쬐는 사막 한가운데서 빛나는 뱀의 자태를 보는 듯하고, 전 세계에서 모인 스타일리시한 여성들의 다채로운 억양과 웃음소리는 레스토랑을 가득 메우며 리드미컬하면서도 달콤한 선율을 이루고 있다. 이때 한 여성이 레스토랑으로 걸어 들어온다. 자유롭게 나부끼는 블론드에 편안한 티셔츠와 데님 팬츠 차림인 그녀는 커다란 토트백을 한 손에 들었다. 블랙 백에는 ‘FEMINIST’라는 문구가 양각의 헬베티카 폰트로 새겨져 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파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치 그 가방에 당당함과 빛나는 자부심을 담아온 듯,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등장한 그녀가 바로 디올의 7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디자이너로 발탁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다.
“몇몇 사람은 생각보다 굳건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꽤 애를 먹곤 해요. 하지만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면에서는 모두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죠. 요즘엔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 할 만하잖아요.” 지난해, 디올의 새로운 디렉터로 발탁된 후 선보인 데뷔 컬렉션의 페미닌한 오프닝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자 그녀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이탈리아 로마 태생의 치우리는 여전히 프랑스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공부 중인데,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얼굴에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 비쳤다.



섬세한 거울 조각으로 완성한 2018 S/S 시즌의 디올 런웨이.



짙은 네이비 블루 컬러의 데님과 유니폼으로 가득했던 2017 F/W 컬렉션.



톱 모델 사샤 피보바로바의 2018 S/S 오프닝 룩.



우리는 파리 마리냥 거리에 있는 디올 본사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단호함이 느껴지는 단발의 플래티넘 블론드를 제외하면 그녀를 이루는 대부분의 색조는 차분하고 깊은 블랙이다. 굵게 그린 검은색 아이라이너부터 발목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블랙 스커트와 디올의 뉴 로고가 새겨진 키튼 힐에 이르기까지, 깊고 짙은 블랙 컬러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디올 본사의 환경과 인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이 모든 건 치우리가 추구하는 디올 스토리의 근본적인 테마를 암시한다. 데뷔 컬렉션에서 그녀는 클래식한 바 재킷과 튤 스커트를 선보이는 한편, ‘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글귀를 새긴 캐주얼한 티셔츠 시리즈도 무대에 올렸다.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 티셔츠의 문구는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의 에세이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물. 쇼의 대미를 장식한 스포티한 퀼팅 펜싱 베스트와 재킷, 스트랩에 힙합 너클더스터 로고를 가미한 골드 백들은 웅장한 패션 판타지를 강조했던 존 갈리아노, 서정적이고 우아한 레이디라이크 룩에 치중했던 라프 시몬스 등 전임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테일러드 작업복과 견고한 데님 소재가 연이어 등장한, 온통 네이비 블루 컬러로 가득했던 두 번째 컬렉션 역시 디올이 추구하는 새로운 변화의 방향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알다시피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선보이는 디올 레이디의 삶은 그저 ‘패션 판타지’의 뒷좌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새로운 비전에 관한 것이죠.” 치우리는 말한다. “디올은 당연히 여성을 위한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날 여성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떠올립니다. 흔히 패션을 이야기할 때 ‘시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쉽게 간과되죠. 하지만 그건 무척 중요한 문제이며, 미래를 생각한다면 더욱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이슈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디올이 새로운 디자이너로 치우리를 발탁했을 때 전 세계는 EU 국민투표와 미국 대선 여파, 페미니즘의 위기를 둘러싼 여성 담론이 뒤섞여 대혼란을 이뤘다. 치우리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진화를 거듭 중인 페미니즘의 흐름과 정치적 이슈를 간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패션 업계에 몸담은 여성으로서 사회적 이슈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제들을 외면한 채 함구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패션 브랜드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당연히 여성 문제에 관해 논해야 합니다. 옷을 입는 방식부터 개인의 관점, 어떻게 스스로를 규정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말이에요. 패션은 아름다운 옷 한 벌에서 출발하지만, 특정 메시지가 없다면 그저 영혼 없는 ‘예쁜 옷’에 불과하니까요.”
이렇듯 단호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그녀가 디올에 정착한 순간, 하우스에 대한 비전을 두고 대중의 의견은 분분했다. 데뷔 무대에서 관중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일부 소셜 미디어에서는 치우리의 강렬한 메시지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불편한 기색도 내비쳤다. 그러나 디올의 회장이자 최고경영자인 시드니 톨레다노(Sidney Toledano)는 <WWD Women’s Wear Daily>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치우리)는 방향성이 확고하며 보다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여성이라 할 수 있어요. 일부 패션 비평가들은 치우리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인정하지 않지만요.” 그들은 데님과 보일러 수트, 티셔츠가 지나치게 실용적이기 때문에 매년 50억 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다채로운 스토리와 경외심으로 가득한 하우스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치우리의 노선에 이렇다 할 큰 문제가 없는 건 자명하다. 현재 많은 디자이너 역시 그녀처럼 실용성을 강조한 쇼를 선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디올의 2017 S/S 컬렉션은 저항의 슬로건이 새겨진 티셔츠로 가득했다. “어떤 논쟁이든 우선 언급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논쟁 속에서 우리는 편협함과 부조리, 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논쟁의 초점이 바뀔 수도 있지만, 그 또한 반가운 현상이겠죠. 사람들이 제 컬렉션에 대해 비평할 때도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 역시 ‘논쟁’의 일부분이니까요. 괜찮아요.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은 아니죠.” 그녀는 편안한 미소를 띠며 말한다.



하우스의 전통적인 아카이브에 집중한 2017 F/W 오뜨 쿠튀르 컬렉션.



실용적인 아이템의 조합이 돋보였던 2017 F/W 컬렉션 백스테이지.



새로운 감각을 주입하는 데 성공한 치우리의 데뷔 컬렉션.



고전적인 브랜드 로고를 적극 활용한 뉴 백.



반짝이는 메탈릭 드레스가 돋보인 2018 S/S 컬렉션의 후반부.



비평적인 반응은 뚜렷하게 양분된 결과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치우리의 새로운 디올은 2012년 생 로랑 데뷔 쇼를 선보였던 에디 슬리먼의 모습을 반추하게 만든다. 하우스에 새로운 DNA를 주입한 에디 슬리먼의 그런지 룩과 베이비돌 드레스, 록 시크 팬츠와 가죽 재킷은 ‘이브 생 로랑’의 우아함을 좇던 팬들을 낙담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하우스의 수익은 3년간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에디 슬리먼처럼 치우리가 디올에 동일한 영향을 미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녀는 공동 디렉터인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와 함께 발렌티노의 매출을 4배로 끌어올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더불어 패션이 일상에서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실용성과 특별한 판타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역시 치우리다.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디올 레이디 룩’에 초점을 맞춘 치우리는 오랜 시간 유니폼에 집중해 왔다. 어떤 면에서 유니폼은 옷장 속의 베이식한 아이템을 뜻한다. 치우리가 데뷔 무대에서 탐구한 아이템은 펜싱 니트와 베스트, 팬츠, 편안한 스니커즈였으며, 2017 F/W 컬렉션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시대의 여성 작업복에서 영감을 얻은 1960년대 스타일의 밀리터리 유니폼(유틸리티 재킷, 가죽 베레 등)이 줄을 이었다. “알다시피 유니폼은 패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어요. 과거부터 유니폼을 즐겼던 여성의 모습을 상상하고, 디올의 새로운 유니폼을 어떤 이들이 선택할지 떠올리죠. 때로는 유니폼 룩이 뾰족한 스틸레토 힐과 관능적인 드레스보다 훨씬 페미닌하고 파워플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유니폼에 관해 그녀가 한마디 더 보탠다. “모든 여성에겐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은 순간이 분명 있어요.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걸 표현할 수 있지요. 쇼를 통해 전하고 싶은 제 메시지는 각자의 개성이 담긴 ‘퍼스널 유니폼’을 발견하라는 것이에요. 언제나 그랬듯 여성이 스스로 정체성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죠. 사회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획일적인 비전을 강요하기 때문이에요. 여성들은 이것을 부당하게 느끼고 나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어요.”
한편 이탈리아 여성이라는 국적과 워킹 맘이라는 정체성이 치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디올과 패션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그녀는 가족과 사생활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발렌티노에서 디올로 이직할 당시 커리어뿐 아니라 개인적인 부분에서도 여러 걱정이 앞섰어요. 하지만 스스로 변화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단계라고 느꼈죠. 알다시피 저는 53세이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젊을 때와 많이 달라요.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때처럼 새로운 일을 해내고 싶은 에너지는 충분했죠. 가족과 신중하게 의논한 후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어요. 남편과 아들 니콜로(23세), 딸 레이첼(20세)은 ‘지금이 가장 적당한 시기’라며 흔쾌히 격려와 응원을 보냈고, 오히려 파리 여행을 자주 하게 됐다며 좋아해줘서 무척 고마웠어요.” 그녀는 펜디에서 근무할 당시 갓 태어난 딸 레이첼을 데리고 일터로 나갔던 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 “일은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해요. 물론 가족이 최우선이지만 때로는 일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죠. 의도치 않게 우리 가족은 패션과 함께 성장했어요. 상상해 보세요. 겨우 걷기 시작한 아이들이 패션 하우스의 쇼룸을 이리저리 서성이는 광경을요! 저는 여성들이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족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치우리는 현재 파리로 이주해 풀타임으로 근무하고 있고, 골드스미스 대학에 재학 중인 딸 레이첼은 런던에 거주 중이다. 남편 파올로 레기니는 로마에서 셔츠를 만드는 아틀리에를 소유하고 있으며, 아들 니콜로는 파리에서 학교를 다닌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물리적 거리감이 그들의 신뢰와 친밀감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가족은 제게 새롭고 참신한 영감을 선사해요. 특히 아이들은 저와 다른 세대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전달하는 ‘고객’이기도 하죠. 아이들과의 관계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요.” 레이첼이 런던으로 건너간 특별한 이유를 묻자 그녀가 신중하게 답한다. “아이가 다문화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길 원했어요. 이탈리아는 굉장히 전통적이고 마초적인 문화가 강해서 딸이 계속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뿐 아니라 다른 여성들 역시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관점에 대해 똑같이 느꼈을 거예요. 우린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해야만 했죠.”
하지만 치우리의 급진적이고 새로운 관점이 전통적이고 예상 가능한 여성상을 늘 반대하는 건 아니다. 지난해 7월, 앵발리드 박물관에서 선보인 치우리의 쿠튀르 컬렉션은 ‘세상 모든 종류의 여성스러움’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드레스로 가득했으니까. 이렇듯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제시하는 새로운 비전 속에서 여성들은 언제든지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할 준비를 마쳤다. “날이 갈수록 여성들이 권위적인 남성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어요. 디올이 제게 기회를 줬을 때만 해도 많은 이가 놀라워했죠. 정말 세상이 많이 변했네요. 저는 앞으로도 여성들이 더욱 결속력 있게 뭉쳐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세상을 꿈꿔요. 그리고 동시대 여성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 함께 힘을 모으고 의견을 나눠야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어요.”

CREDIT

글 KENYA HUNT
에디터 김미강
사진 MARIPOL, IMAXTREE.COM
디자인 오주희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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