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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 SUN

FASHION FOR ALL

착한 패션의 행보

패션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다. 보다 윤리적이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거침없이 행진 중인 패션계의 새로운 미래

1 비건 패션의 중요성을 홍보 중인 동물보호단체 (PETA)의 퍼포먼스.
2 LC Animals 단체의 퍼 프리 시위.



“패션은 더 이상 상아탑, 즉 특정 소수를 위해 존재하는 영역이 아니다.” 얼마 전 발렌시아가 CEO 세드릭 샤비트(ce′dric charbit)가 건넨 의미심장한 말은 현재 패션계의 상황을 대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발언으로 이슈를 모았다. 마침 에디터의 마음속에도 과연 이 시대의 패션이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분야이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기에 유명 CEO의 간단명료한 발언은 곱씹어보기에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패션에 푹 빠지게 된 계기는 바로 소수 집단이 향유하고 리드하는 하이패션의 ‘특수성’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는 ‘난해하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유명 디자이너의 예술 작품과 같은 컬렉션에 감동하고, 거금을 들여 그 작품을 구입하고 만족하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이 꽤 유혹적이었달까. 단순히 예쁜 옷을 쇼핑하는 게 아니라 선망하는 디자이너의 미학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은밀한 자부심이 패션 필드에 몸담게 된 동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근거 없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패션계가 추구해 온 숨막히는 속도감, 유행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행해온 자연 파괴와 자원 낭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강박은 뜨거운 애정도 차갑게 식힐 만큼 무분별했으며 윤리적이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거침없이 폭주하는 열차에서 내려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무렵, 반갑게도 동일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용기 있는 움직임이 오랜 시간 고착화된 패션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윤리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소수가 아닌 많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로 견인하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단연 자연과 더불어 상생하려는 패션계의 행보다. 리얼 퍼의 포근한 온기를 마음껏 즐기고, 가방과 신발은 단연 가죽이 최고라 여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옛말’이 돼버렸다. 동물애호가들의 지속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밍크와 라쿤 할 것 없이 다양한 동물의 털을 아낌없이 사용해 호화로운 런웨이를 선보인 하우스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 심지어 런던은 아예 컬렉션 기간 동안 리얼 퍼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구찌와 샤넬, 버버리, 베르사체 등 빅 브랜드들 역시 퍼 프리 흐름에 적극 동참해 새로운 패션 역사를 쓰고 있다. 지난 2월 1일 LA에서 진행된 ‘비건 패션 위크(VFW)’는 이런 변화가 친환경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선택임을 명시했다. 비건 패션 위크 창립자이자 동물 권리 운동가인 엠마뉴엘 리엔다는 “나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인간의 삶, 동물의 권리와 환경에 대한 존중을 교육하고 이끌어냄으로써 긍정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며 이번 패션 위크 개최 의의를 전했다. 나흘간 진행된 비건 패션 위크에서 디자이너들이 야심차게 선보인 컬렉션은 모두 식물을 비롯한 자연친화 원료로 완성했으며 가죽과 모피, 비닐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결과물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냈다. 또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소비되는 패션 자원과 환경오염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고, 리사이클링과 기부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자연과 상생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패션’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이제 모든 패션 브랜드의 뉴 이어 플랜에서 목표 판매량만큼 중요한 단어는 단언컨대 자연 친화와 지속 가능성일 것이다.




특정 국가와 인종을 비하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프라다와 돌체 앤 가바나.



한편 꾸준히 언급돼 온 다양성(Diversity) 역시 패션이 더 이상 소수를 위한 ‘판타지’의 영역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종과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얼마나 다양한 모델을 기용했는지가 해당 브랜드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음은 물론 백인 모델만 등장시킨 브랜드는 대중에게 즉각적인 비난을 받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번 S/S 시즌 프라발 구룽, 파이어 모스, 세비지×펜티 등에 등장한 각양각색의 모델을 필두로 한 보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신드롬은 다양성과 맞물린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바비인형처럼 날씬한 44 사이즈가 아닌, 대부분의 평범한 여성들을 위한 ‘진짜’ 패션의 시대가 막을 연 것. 게다가 미국패션디자인협회(CFDA)가 올해부터 모델들의 다양성에 집중하겠다고 밝힌 뉴스 역시 백인우월주의로 점철된 패션계가 비로소 새롭게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되며 뜨거운 이슈를 모았던 돌체 앤 가바나와 프라다의 특정 국가 및 인종 비하 사건 역시 중요하다.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가볍게 넘어갔을 소란스러운 ‘이벤트’에 불과했겠지만 대중의 인식이 어느 때보다 깨어 있는 시점에서 해당 이슈는 모른 척 덮어둘 수 없는 민감한 주제임이 분명하니까. 다양한 인종과 성별, 외모의 모델이 런웨이는 물론 광고 캠페인에서도 압도적 존재감을 지닌 지금, 특정 집단의 우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결과물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할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다. 우리는 분명 패션을 통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내밀한 아름다움과 판타지를 향유할 수 있었고, 또 패션의 이런 특성 덕분에 앞으로도 다채롭게 채색된 일상을 즐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인류가 저지른 과오를 인정해야 할 순간에 비로소 직면했다.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기에 비윤리적임을 인식하지 못했던 일들!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현실에 더욱 밀접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패션을 즐긴다면 아마 훨씬 아름다운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그러니 현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패션계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길. 패션의 새로운 시대를 책임질 이 적극적인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됐다.

CREDIT

에디터 김미강
사진 IMAXTREE.COM
디자인 이효진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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