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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4. FRI

VOTE FOR PANTS

도전! 팬츠 수트

수트 드레싱을 향한 여자들의 패션 여정 다이어리.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늘 내 엉덩이를 예의주시했다. 조금이라도 사이즈가 커지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잔소리가 시작됐고, 지금도 팬츠 속으로 엉덩이를 밀어넣을 때마다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린다. 엄마는 평생 살이 찐 적도 없고 허리 사이즈는 당연히(?) 18인치였던 축복받은 몸매의 소유자였던 터라 내 엉덩이의 풍만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한다는 건 경제공황 한 번, 세계대전 두 번을 겪은 엄마 세대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내게 노골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풍만해지는 딸의 엉덩이가 혹여 도발적으로 보일까, 그저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딸에게 부적절한 시선이 닿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시즌 그 어느 때보다 완벽에 가까워진 팬츠 수트가 런웨이에 활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새삼 팬츠를 멀리한 그 시절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아이스 스케이팅과 수영으로 한껏 올라붙었던 히프가 아까울 뿐! 엄마의 걱정이 아주 황당한 건 아니었다. 통통하게 차오른 엉덩이로 섹슈얼한 시선이 쏠리기도 했고, 누군가의 손이 내 엉덩이를 꼬집거나 움켜쥘 때도 있었다. 고문에 가까웠던 훈련으로 다듬어진 내 대두근이 고작 그런 시각적 흥분제로 몰락한 것에 상처를 받았다. 나를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 사람들에게 화를 냈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수치심과 불편함에 어쩔 줄 몰랐다(물론 지금도 그런 시선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감사할 따름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늘 스포티하고 클래식한 드레스를 입었다. 이따금 데님도 입었는데, 그중에서 랭글러의 빨강, 파랑, 하양 별과 줄무늬가 그려진 데님 플레어 팬츠를 가장 좋아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처음으로 나를 데리고 팬츠를 사러 나섰다. 결국 엄마가 사준 건 시나몬 컬러의 폴리에스테르 팬츠 수트. 재킷 대신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튜닉을 입어 엄마의 바람대로 엉덩이를 철벽처럼 방어할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수트라기보다 그냥 팬츠 위에 드레스를 입은 격이었다. 그것도 뻣뻣하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드레스. 엄마가 사준 수트를 입느니 피터팬 칼라에 자그마한 리본 장식의 체크 드레스를 입는 편이 나았다. 드레스를 입을 때는 다리를 마음껏 차올릴 수 있어 좋았고(속옷이 보이는 것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의미) 내 안에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던 소녀스러움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드라마 <미녀 삼총사>에 나온 셸리 해크(Shelley Hack)와 찰리(Charlie) 향수 광고에서 로렌 허튼이 남자처럼 팬츠 수트를 입고 칵테일을 한잔하는 모습에 끌리기도 했다. 자신감 넘치고 편해 보이는 그녀들의 모습을 동경했다.




낸 켐프너(Nan Kempner)가 60년대 후반 사교계의 허브였던 라 코트 바스크(La Cote Basque)에서 팬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자 그 자리에서 팬츠를 벗고 재킷을 미니드레스처럼 입고 입장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98년까지도 여성과 팬츠의 애증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법정에서 있었던 ‘데님 변호’도 웃지 못할 사건이다. 한 강간 사건의 재판에서 피고인의 변호사가 피해자 여성은 본인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벗길 수 없을 정도로 타이트한 진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피고인이 여성을 강간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와 팬츠의 애증 관계는 한동안 지속됐다. 농장에서 자란 엄마에게 데님은 얼마 전까지도 자신이 속해 있던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표식 같은 것이었다. 판자처럼 뻣뻣한 팬츠 수트 몇 벌을 더 구입한 후에야 나는 엄마 몰래 친구들과 쇼핑몰에 가서 하이웨이스트 진을 사서 옆집 마당에 숨겨놓고 매일 학교 가기 전에 갈아입고 갔다. 학교에서 잘나가는 애들은 모두 데님만 입었고, 이들에게 뒤처질 수 없었던 난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가기 위해 하루에 네 번씩 바지를 갈아입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은 리바이스 한 벌로 버텼다. 리바이스에 거즈 소재 페전트 블라우스 한 벌만 늘 입어서 졸업할 무렵에는 옷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맨해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팬츠를 아예 입지 않게 됐다. 아마 그때까지도 엄마의 경고가 마음속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엔 오버사이즈 남성 재킷에 플리츠 팬츠를 입고 벨트를 하는 ‘워킹 걸 룩’이 그토록 유행했는데도 난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보다 춤추고 클럽에 가기 편한 레깅스에 단색 라이크라 드레스를 입고 불투명 타이츠에 스퀘어 토의 로베르 끌레제리(Robert Clergerie) 슈즈를 신고 빈티지 남성 블레이저를 걸치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90년대에는 진 위에 실크 슬립을 레이어드하는 그런지 스타일을 즐겼다. 당시 신화적인 카테이온 아델리(Katayone Adeli)의 블랙 팬츠를 한 벌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팬츠를 입으면 너무 회사원 같은 느낌이 들어서, 대신 일본 디자이너와 앤트워프 식스의 음울한 룩을 입고 빔 벤더스(Wim Wenders) 영화에서 걸어 나온 듯 부랑아 같은 모습으로 돌아다녔다. 허리 살이 삐져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가 입어야 했던 로라이즈 데님의 폭풍 속에서도 난 안나수이의 유쾌 발랄한 드레스를 고집했다. 뒤로는 스텔라 맥카트니와 피비 파일로의 끌로에 진을 모두 사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던 내가 본격적으로 팬츠를 입기 시작한 건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에서 디자인한 2000년대 초반이다. 제스키에르는 매 시즌 와이드와 커프드, 하이웨이스트, 플리츠 디자인을 오가며 역사상 최고의 블랙 팬츠를 쏟아냈다. 하지만 팬츠에 어렵게 다가선 나를 다시 좌절시킨 건 3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느려진 신진대사였다. 점점 살이 찌는 내게 한 패션 에디터가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다면 지금이 적기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 아이를 낳은 다음에 한 번만 다이어트하면 될 테니까. 이 조언을 듣고 두 아이를 낳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출산과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팬츠를 샀다. 마음에 드는 팬츠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추억이 된 스몰 사이즈를 구입했다. 이따금 몇 벌 입어보려 했지만 허벅지에 걸려 올라가지 않을 때마다 패배감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마침내 지난해부터 혹독한 다이어트를 실천해 불어난 몸무게의 대부분을 뺐다. 내 몸무게를 되찾은 타이밍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 폴리에스테르 튜닉에 팬츠를 입던 시절에서 40년이 지난 올가을 팬츠 수트가 다시 트렌드를 지배하고 있으니. 태어나 처음으로 패션 맛을 본 소녀처럼 나는 팬츠 트렌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시즌 최고의 팬츠 수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날씬하게 피트되는 팬츠에 재킷을 매치하는 스타일로 데렉 램의 모즈풍 헤링본 더블브레스트 수트, 구찌의 슬림한 블랙 앤 화이트 턱시도가 대표적인 예다. 두 번째는 히프와 어깨를 강조하는 구조적인 스타일이다. 발렌시아가의 파니에와 어깨 패드가 들어간 버전이 그중 하나다. 그 외에도 크리에이처 오브 컴포트(Creatures of Comfort)의 코듀로이와 벨벳 소재의 더블브레스트 재킷과 넉넉한 팬츠, 자크뮈스의 만화 같은 오버사이즈 팬츠 수트가 있다. 드리스 반 노튼의 금빛 테디 보이 턱시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시즌 우리 앞에는 창의적이고 장난스러우면서 시크한 팬츠 수트가 줄지어 서 있다.
나는 목표한 몸무게에 도달하자마자 본격적으로 팬츠에 도전했다. 팬츠의 거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데렉 램에서 구입한 팬츠를 차례로 입어보며 납작해진 배와 탄력 있는 엉덩이를 확인했다. 셀린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완벽한 드레이프와 가장 호화로운 소재의 팬츠 세 벌을 사들였다. 매일 이 바지들을 입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에는 경쾌함이, 눈에는 반짝임이 더해진다. 누군가가 내 뒷모습에 감탄사를 보낼 때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내는 여유도 생겼다. 마침내 엄마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워낸 지금, 그동안 나를 옭아맸던 생각들을 후회한다. 살을 뺄 때까지는 팬츠를 입을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유쾌하다. 팬츠 덕분에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CREDIT

CONTRIBUTING EDITOR 백지원
WRITER ANNE SLOWEY
PHOTO GETTY IMAGES/IMAZINS/REX FETURES/IMAXTREE.COM
DIGITAL DESIGNER 최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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