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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1. WED

DAWN OF ASIAN MOVEMENT

아시안 파워의 물결

할리우드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아시안 파워는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다. 편견을 넘어 변화를 일으킬 의미있는 도전들이 예고돼 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중국계 혼혈 배우 클로이 베넷(본명 클로이 왕)은 할리우드에 만연한 아시아계 차별 때문에 본래 성인 왕(汪)을 지워버렸다. “할리우드는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성을 가진 나를 캐스팅하지 않았어요. 이름을 바꾸고 참여한 첫 번째 오디션에서 캐스팅됐어요. 할리우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들었던 입소문이 매우 명확해지는 순간이었죠.” 2017년 사우스 캘리포니아 대학(USC)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미국 흥행 100위 내 영화 중 동양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37편에 불과했다. 한인 배우 대니얼 대 킴과 그레이스 박은 오랜 시간 몸담은 CBS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에서 자진 하차했다. 백인 배우보다 낮게 책정된 임금이 문제였다. 동등한 임금을 요구했으나 CBS 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니얼 대 킴은 하차 당시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평등을 향한 길은 쉽지 않아요. 아시아계 미국 배우들이 기회를 잡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기회를 잡아도 허들은 존재한다. 역할의 한계다.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는 대개 악당이거나, 주인공 친구이거나, 무술 고수이거나, 끔찍한 공부벌레이거나, 그도 아니면 괴짜였다. 백인 중심의 할리우드에서 동양계 배우들이 겪은 수모는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측면이 있다.
그랬던 할리우드에서 2018년 8월은 동양인 파워가 지각 변동을 일으킨 기념비적인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진원지는 로맨틱 코미디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다. 중국계 미국인 존 추가 메가폰을 잡고 거의 모든 역할을 동양계 배우들이 맡은 영화는 개봉 후 3주간 북미 박스오피스 1위라는 ‘미친’ 기록을 세우며 돌풍의 중심에 섰다. 캐스팅의 90%가 흑인으로 구성된 마블영화 <블랙 팬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블랙 파워’를 입증한 것에 빗대 누군가는 이 영화를 이렇게 평했다. ‘아시아판 블랙 팬서’. 동양계 배우들로 구성된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관객과 만난 것은 웨인 왕의 <조이 럭 클럽> 이후 무려 25년 만이다. 동양계 미국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흐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상영관 표를 사들인 뒤 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방식으로 영화를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계 미국인 에릭 남 역시 애틀랜타의 한 극장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전석 티켓을 구매해 팬에게 무료 배포했다. 에릭 남은 상영회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주류 미디어가 동양인을 과소평가하는 방식에 지쳤어요. 우리는 괴짜 기술자나 수학 천재, 닌자 같은 자객이 아니에요. 우리는 멋지고 아름답고, 섹시하며, 그 이상이기도 합니다.”


<프레쉬 오프 더 보트>



<서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촉발한 동양인 돌풍이 단순한 ‘현상’이 아닌 ‘사건’이 될 수 있었던 데는 2주 차이를 두고 개봉한 존 조 주연의 영화 <서치>와 넷플릭스 TV 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연이은 선전도 크게 작용했다. <서치>는 동양계 미국인 배우가 주역을 맡은 최초의 메인 스트림 스릴러다. 실종된 딸의 흔적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서치>에서 감독이 존 조에게 요구한 건 <테이큰> 유의 액션이 아니다. 극중에서 존 조는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일 뿐이다. 바로 백인 남자 배우들의 전유물이었던 역할이다. 주인공 가족이 한국계 미국인임을 드러내는 장면도 딸의 통화 목록에 한글로 저장된 ‘엄마’라는 글씨와 죽은 아내가 자주 만들었다는 김치 요리 ‘검보(Gumbo)’가 전부다. 딸의 실종 원인을 아시아계 인종차별에서 찾는 ‘뻔함’도 이 영화에는 없다. 동양인 배우를 내세웠지만, 그 이유에 구구절절 사연을 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치>의 사례는 귀하다. ‘아시아 무브먼트’를 주도하고 있는 또 다른 작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금발 여성이 도맡다시피 한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한국계 미국인을 내세우는 파격을 선보인 경우다. 짝사랑 상대에게 몰래 쓴 러브레터가 달달한 후폭풍을 몰고 오는 이 로맨틱 드라마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시청자들의 후일담은 SNS에 흘러넘친다. 베트남계 미국 배우 라나 콘도르가 연기한 주인공 라라 진은 피부색이 로맨스 장르에서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서 <서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로 이어지는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선전을 두고 할리우드에선 ‘아시안 어거스트(Asian August)’란 말도 생겨났다.
물론 이런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인종적 다양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식이 바뀌었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라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 트로피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이렇게 외쳤다. “인클루전 라이더(Inclusion Rider)!”  이 말은 영화인들이 계약서에서 요구하는 조항 중 하나로 다양성에 기반해 제작진과 배우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지난 9월 워너 브러더스, HBO, 터너 등을 보유한 워너미디어는 ‘인클루전 라이더’를 자사의 모든 제작활동에 적용한다고 선언했다. 2016년 소셜 미디어에서는 ‘존 조 놀이’(#StarringJohnCho; 할리우드영화 포스터에 존 조의 얼굴을 합성해 공유하는 문화 현상)가 유행하기도 했다. 동양인 역할에 백인을 투입하는 일명 ‘화이트 워싱’에 대한 반발이었다. 견고한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으로 가로막혔던 할리우드의 편견을 넘어서려는 도전도 많았다. ABC 시트콤 <프레쉬 오프 더 보트>는 아시안 아메리칸 가족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공중파 시리즈물.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현재 시즌5가 방영 중이다. 한국계 이민자 가족을 소재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은 ‘캐네디언 스크린 어워드’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워킹 데드>의 스티븐 연이 아시아계 남자도 주류 콘텐츠에서 섹스어필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동안, 다니엘 헤니는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잘생김’을 연기하며 동양 남자에 대한 편견과 맞서기도 했다. 이런 시도들이 차곡차곡 쌓이지 않았다면 ‘아시안 어거스트’도 없었을 것이다.


<뮬란>



<크리미널 마인드>


<조이 럭 클럽>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까지의 지난한 시간이 알려주듯, 기회를 잡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다행히 현재 할리우드엔 아시안 무브먼트의 불씨를 이어나갈 만한 프로젝트들이 쏙쏙 포착되고 있다. 최근 애플사는 1.5세 한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를 드라마로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3개 국어로 만들어지며 아시아 배우들이 주축이 될 전망이다. 영화 쪽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작품은 디즈니가 실사로 만드는 <뮬란>이다. 2015년 제작을 발표한 이후 시종 화이트 워싱에 대한 우려를 낳았지만, 중국 배우 유역비가 최종 캐스팅되면서 논란은 자취를 감췄다. 견자단, 이연걸, 공리 등도 합류해 아시안 파워에 힘을 싣는다. 일본계 미국인인 캐리 후쿠나가가 <제임스 본드 25> 메가폰을 잡은 것도 최근 큰 화제였다. DC <아쿠아맨>의 사령탑을 맡은 말레이시아 출신 제임스 완, <할리퀸> 스핀오프 감독으로 내정된 중국 출신 감독 캐시 얀 등 히어로영화 역시 유색 인종 감독 끌어안기에 적극적이다. ‘백인들의 잔치’라는 비난을 받아온 아카데미 시상식은 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성과 비(非)백인 회원의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중이다. 2016년 이병헌은 아시아 배우로는 처음으로 시상자로 무대에 올라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 아카데미 역사에서 동양계 배우의 시상 기록 역시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다.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상은 문화적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 2017년 <문라이트>가 그런 경우다. 모든 출연진이 흑인 배우인 최초의 최우수작품상 영화라는 점에서 흑인 사회는 물론 백인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영화산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과연 아시아계 배우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서로 껴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시안 어거스트에서 촉발된 아시안 웨이브는 미풍에 그칠까, 아니면 더 큰 변화를 몰고 올 태풍이 될까.  

CREDIT

글 정시우
사진 COURTESY OF NETFLIX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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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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