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라이프 > 컬쳐

2018.11.14. WED

TIMELESS PIECES

에르메스와 문화재청이 만났다고?

고종의 침전, 덕수궁 함녕전이 최고 장인들의 손끝에서 제 모습을 찾았다. 3년의 시간과 정성을 기울인 에르메스 코리아와 문화재청의 첫 프로젝트

왕의 이동식 의자 용교의는 현대의 의자와 흡사하다. 등받이에는 용문, 수문, 당초문 등이 화려하게 투각돼 있고, 옻칠로 마감했다. 나무를 깎아 휘게 한 다음, 의자 바닥엔 가죽을 대고 장식은 철물로 디자인했다.




함녕전 전면에 서면 보이는 대청마루 복판의 용교의. 복원 이전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궁은 서울에서 사통팔달에 있지만 여전히 심정적인 거리가 있다. 누구와 동행하든 이번 주말 당장 가야 할 이유가 궁에는 없다. 무엇보다 궁에 가면 뭘 봐야 하는지 몰랐다. 내부를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알 길 없고, 모든 문화재가 으레 해당 시대(어쩌면 그냥 ‘옛날’)의 것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실제론 그렇지 않다. 문화재는 계속적으로 복원돼야 하고, 복원되고 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에르메스는 잘 알고 있었다.
180년간 오랜 전통과 장인 정신으로 최고의 제품을 제작해 온 에르메스는 현대에도 장인의 기술과 노하우를 보존하는 데 지속적인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하여 2015년 에르메스 코리아와 문화재청은 ‘한문화재 한지킴이’ 협약을 체결하고 국내 장인들의 전통적인 기술을 지켜나가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첫 프로젝트는 바로 덕수궁 복원사업. 궁궐은 당대 최고의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곳이다. 어느 시대든 최고의 장인들이 예술적·기술적으로 넘볼 수 없는 기물을 만들어 진상했다. 최고의 장인들이 누구보다 뛰어난 수준의 제품을 만든다는 브랜드, 에르메스의 모토와 같다.



용교의는 고종을 상징하는 금분칠을 했다. 해의 방향에 따라 다른 빛을 내 은은한 화려함을 더했다.



가마솥에서 치자와 함께 삶은 왕골 껍질을 얇게 저며 노란색으로 물들인 다음 이것을 바늘에 끼워 돗자리에 무늬를 넣는 방식으로 제작한 용문석.




오봉병은 궁중에서만 쓴 그림,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 달, 소나무, 물을 일정한 구도로 배치한 병풍이다. 높이는 약 2.5m, 총 6폭으로 아교와 백반을 섞은 화견에 청·홍·녹·백·흑의 안료를 섞어 화려하게 채색했다.




주렴은 발을 만들고 지지대와 함께 옻칠한 후 명주실을 꼬아 거북의 등껍질 문양으로 엮은 후 가장자리는 무명 천으로 마감했다.



궁궐에 관련된 모든 결정은 문화재청이 한다. 에르메스 코리아와 문화재청 사이에 공문서가 오가는 데까지 문화재단 아름지기는 다리가 됐다. 아름지기는 이전에도 궁궐과 관련된 복원 프로젝트를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다. 아름지기재단 장영석 국장의 설명은 명쾌했다. “첫 번째 장소를 덕수궁으로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덕수궁은 다른 궁에 비해 조금 더 도심에서 사람들이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 작습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너무 커요. 작게 한 개의 전각을 온전히 복원했을 때의 완성도나 주목도를 고려했지요.” 문화재청도 반겼다. 공공예산은 실험적 규모로 쓰기 어렵다. 최소 단위도 자릿수가 상당하다. 그런데 궁의 한 개 전각에만 3년을 쏟고, 이미 원안이 사라진 물건까지 고증을 통해 복원한다니, 문화재청 입장에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다. 게다가 장인들에게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새로운 부류의 꿈이나 다를 게 없었다. 궁궐이라서? 물론 가장 영광스러운 타이틀인 건 틀림없다. 그러나 장인들은 대부분 “전시하고 나서 치우는 거냐”고 가장 먼저 물었고, 영구적으로 놔둔다는 답에 아이처럼 신나 했다. 대부분 무형문화재로 이미 예술성을 인정받은 장인들에게 유리벽 안에 갇혀 먼지나 쌓이는 전시품에 비하면 실제 쓰임새에 가깝게 만들 수 있는 ‘일감’이라는 실용성은 가슴 뛰는 것이었다. 

덕수궁 함녕전은 100년간 거기 있어도 있는 게 아니었다. 겉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내부는 거의 비어 있었다. 함녕전은 조선 말기 고종과 순종의 침전으로 사용된 곳이고, 사실상 고종이 상당 시간을 보내다 승하한 곳이다. 평소엔 관람객 입실이 통제되고, 문 한쪽을 열고 닫는 것조차 허가가 필요하다. 취재를 위해 특별히 허락받아 들어선 그곳은 이미 복원이 완료된 후에도 왕의 침전이라기엔 놀랄 만큼 단출했다. 방 안에는 단 한 점의 가구도 없다. 사극에서 본 보료 한 점 깔려 있지 않았다. 빈방에 서면 벽과 바닥만 보인다. 복원 첫해는 도배와 장판부터 시작했다. 벽은 초배지 위에 배첩 장인이 제작한 능화지를 덧발랐고, 방바닥은 한지 순지로 초배, 양지로 중배한 뒤 물을 축여 장판지를 마지막으로 바르는 과정을 거쳤다. 그다음엔 지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은 ‘무렴자’를 복원해 걸었다. 일종의 방한용 겨울 누비 커튼으로, 문헌에 남은 기록과 비슷한 유물을 고증해 새로운 실물을 제작했다.



현대식 황금 아치가 걸린 함녕전 내부. 고종이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이다.



왕비의 방에 걸린 무렴자는 서쪽을 상징하는 백색 바탕에 왕비의 기품을 담은 쪽빛을 배합했다.



왕의 방 무렴자 가운데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 무늬를, 손바느질로 새겨넣었다.



지지대 위 오얏꽃 모양의 백동 소재 장식.



커튼처럼 말아올려 지지대에 걸어둘 수 있다.



각각 다른 색으로 염색한 실을 꼬아 매듭을 만들어 걸었다.



함녕전은 조선시대에 대대손손 내려온 건축물이 아니라 거의 고종 시대만 담은 문화재다. 그 예로 매우 서구적인 분위기의 아치형 황금색 장식이 대들보 아래 걸려 있고, 천장에는 샹들리에까지 매달려 있다. 고증 팀은 고종과 관련된 자료에 집중했는데, 사진 속에서 고종의 뒤로 드리워진 나무 소재 발을 발견했다. 이것은 궁궐에서만 사용되던 ‘주렴’으로, 역시 실물 유물은 남아 있지 않았으며 두 번째 해의 복원 대상이 됐다. 사람의 손으로 3m 이상의 발을 고작 4mm 두께의 대나무 올로 꼬아 만든다는 건 엄청난 수작업을 요구했다. 특히 서울에 있는 궁궐에 주렴이 복원 설치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세 번째 해에는 양쪽 온돌방 사이의 대청마루 공간에 왕실의 품격을 상징하는 용교의, 용문석, 오봉병을 놓았다. 용교의는 왕이 앉던 접이식 의자, 용문석은 용교의를 약간 높게 받쳐주는 단, 오봉병은 왕의 뒷모습을 가려주는 거대한 사이즈의 병풍이다. <고종실록>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함녕전에 나가 러시아의 전 공사 마튜닌과 새로 임명된 공사 파블로프를 접견하였다.’ 고종이 집무를 보기도 했던 공간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렇게 3년간 총 10명의 장인이 10개 정도의 오브제를 완성해 함녕전 복원이 끝났다.
수화기 너머로 아름지기재단의 장영석 국장은 이런 말을 했다. “모두 아주 신중했고, 천천히 하자고 했어요. 기업이 사회 환원하는 식으로 생색이나 내고 싶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장인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단순한 형태는 얘기가 금방 쑥 들어갔어요. 공간에 제대로 남겨질 무언가를 통해 장인 정신을 이어가는 게 중요했죠. 근본적으로요.” 에르메스는 보존과 복원에 장인의 기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문화재 보전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에 함께한다는 것을 약속으로 증명했다. 함녕전이 완성됐으니 끝이 아니냐고? 프로젝트 팀은 바로 다음 장소, 즉조당을 복원 중이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세울 때 집무 공간으로 쓴 개인 사무실 같은 곳이다. 덕수궁에 생명이 불어넣어지고 있다.

CREDIT

사진 김성곤
컨트리뷰팅에디터 이경은
디자인 전근영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
참고하세요!

저작권법에 의거, 엘르온라인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타 홈페이지와 타 블로그 및 게시판 등에 불법 게재시 불이익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