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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1. MON

SPICY STORY

매운맛을 보여줘

한식의 칼칼한 매운맛을 외국인들이 찾기 시작했다


뉴 코리언 다이닝의 효시 ‘정식당’을 이끄는 임정식 셰프는 지난 1월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 ‘평화옥’이라는 대중음식점을 열었다. 국내 파인다이닝 시장을 개척해 온 그가 대중음식점을 차렸다는 소식에 많은 이목이 집중됐다. “파인다이닝을 10년째 운영하며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캐주얼 레스토랑을 해보고 싶었어요. 전 세계에 불고 있는 라멘 열풍이 부럽기도 해 라멘처럼 폭넓게 받아들여질 한식 메뉴를 찾았어요. 그런데 딱히 없더라고요. 보통 불고기나 비빔밥을 많이 거론하는데, 불고기는 아시아 어디에나 있는 음식이고 비빔밥은 이름부터 모호하잖아요.” 고민을 거듭하던 임 셰프의 머리에 스친 것은 우리의 국밥 문화였다. “라멘, 톰양쿵, 베트남 쌀국수 등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아시아 음식은 공통적으로 탄수화물이 결합된 국물 요리에요. 국에 밥을 말아 먹는 방식은 해외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우리의 문화인 데다 확실한 탄수화물과 국물의 조합이죠.” 임 셰프가 처음 지목한 음식은 곰탕이었다. 하지만 썩 흡족하지 않았단다. “곰탕은 서양 요리의 기본 육수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어요. 고민 끝에 빨간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이야말로 우리 문화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하여 다대기를 풀어 시뻘건 ‘매운 양곰탕’이 평화옥의 대표 메뉴로 등극했다. 먹어보면 제법 맵지만 근래의 한식이 추구하는 맛보다 덜 달다. 임 셰프가 매운맛에 주목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뉴욕 소재 정식당에서 1년 반 동안 칼칼하게 양념한 해장국을 선보였다. 한글로는 ‘해장’, 영어로는 ‘Pork Belly in Spicy’에 해당하는 메뉴였다. “그곳에는 다국적 직원들이 일해요. 한번은 그들에게 매운 해장국을 해줬는데 굉장히 좋아했어요. 해장국을 또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죠. 의외의 반응을 보며 일부러 매운맛을 피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레 ‘못 먹을 거야’ ‘싫어할 거야’라고 생각할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메뉴에 매운 해장국을 올렸어요.” 하지만 테이스팅 코스 위주로 운영하는 파인다이닝에서 매운 음식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연속성이 중요한 코스 메뉴 중간에 매운맛이 들어가면 미각이 무뎌져 디테일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서빙되는 음식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만큼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현재 뉴욕의 정식당에는 해장국 대신 맑은 곰탕이 오른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 <마스터셰프 코리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에 인지도를 쌓은 김훈이 셰프는 뉴욕에서 두 곳의 한식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미슐랭 가이드 뉴욕>에서 별을 받기도 한 ‘단지’는 밥집, ‘한잔’은 주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술집에 가깝다. “한식에서 매운맛은 큰 이점이 될 수 있어요.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한식의 매운맛은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요리에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봐요.” 각각 9년째, 6년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단지와 한잔을 찾는 외국인 손님들도 김 셰프의 생각에 동의할까. “9년 전만 해도 고춧가루나 고추장이 약간이라도 들어가면 설령 그 메뉴가 된장찌개처럼 맵지 않아도 ‘Spicy’라고 표기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강렬한 인상을 남길 정도로 강도가 센, 극히 일부 음식에만 ‘Spicy’를 표기해요. 그만큼 우리 가게를 찾는 외국인들이 매운맛을 수용하는 정도가 점점 커졌음을 시사해요.” 한잔에서 내놓는 떡볶이에는 고추장은 물론 청양고추를 넉넉히 넣는다. 매운 음식을 즐기는 김 셰프도 맵게 느낄 정도다. 그럼에도 지난 6년 동안 한잔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메뉴는 떡볶이다. 맵다는 이유로 컴플레인이 들어온 적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으레 서양인들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지레짐작한 건 아닐까. 한식이 맵고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2000년 이전 해외에서 요리를 배운 셰프들로부터 김치 등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일부러 먹지 않았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어릴 땐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잖아요. 나이가 들면서 꺼리던 매운맛, 신맛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 맛들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입맛이 성숙해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매운맛을 경험하지만 서양인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매운 감각이 얼마나 훌륭한 미각 요소가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될 거예요.” 김 셰프는 한식에서 매운맛이 이점이자 확실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이유로 장을 꼽는다. 시간과 자연의 힘에 기대 숙성되고 발효되는 우리네 장에서는 강한 우마미, 즉 감칠맛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춧가루도 햇볕에 말리잖아요. 여기에서 나온 매운맛은 다른 국적의 주방에서 내는 매운맛과 차별되는 굉장히 독창적이고 깊은 풍미를 띠어요. 서양인들은 이런 풍미를 맛본 적 없어 그 깊은 맛의 진가를 단박에 알지 못해요. 그렇지만 시간과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외국인들도 그 맛을 따라올 거라고 믿어요.” 그럼에도 김 셰프는 매운맛이 한식을 규정하는 것은 경계한다. 매운맛이 한식의 풍미를 다채롭게 하지만 모든 한식이 매워야 맛있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중국의 사천요리나 인도 요리는 확실히 매울수록 맛있는 음식이라 여겨요. 한식은 모든 음식이 매울 필요가 없어요. 우리에겐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죠.”


한편 한국식 매운맛의 글로벌화에 대한 흥미로운 의견도 있다. 임홍재 푸드 콘텐츠 프로듀서는 해외에 한식의 매운맛을 알린 주역으로 불닭볶음면을 꼽는다. “정식당이나 단지, 한잔 등 특정 한식 레스토랑을 통해 한식을 경험하는 외국인들은 극소수에 해당해요. 현재 불닭볶음면을 소재로 해외에서 만들어진 유튜브 콘텐츠가 몇 개인지 아세요? 100만 개가 넘어요. 실제로 아마존에서 불닭볶음면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어요. 옳고 그름을 떠나 불닭볶음면이 역으로 한식의 매운맛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요.” 모바일 미디어 ‘메이크어스’에서 푸드 콘텐츠를 제작하는 임 프로듀서는 불닭볶음면이 등장한 배경을 덧붙여 설명했다. 2007년쯤 청양고추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매운맛을 내기 위해 베트남 고추 등을 수입한 결과 음식의 매운맛이 전반적으로 강해졌다. 그 흐름이 유행이 됐고 강렬한 매운맛을 내세운 인스턴트 음식이 나오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베트남 고추로 낸 매운맛을 한식의 한 요소로 포함해야 하는지에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뉴 코리언 다이닝이나 콘치즈와 초밥이 포함된 인사동의 한정식도 한식이라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에게는 불닭볶음면도 한식의 일부로 보일 거예요. 물론 기존 한식이 가지고 있는 밸런스가 무너진 채 매운맛만 강조한 지금의 흐름이 유감스럽긴 해요.”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인보다 매운 음식을 더 잘 먹는 외국인을 여럿 만났다. 그때마다 놀랍고 부끄러운 마음에 전통 한식은 이 정도로 맵지 않다고 강조하며 둘러댔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 문화가 서양의 그것보다 열등하다는 굴레에 갇혀 한식을 바라본 건 아닐는지, 나부터 재고해야 할 시점이다.

CREDIT

글 이주연
에디터 김영재
사진 CORA BUTTENBENDER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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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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