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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THU

ONE DAY, SUDDENLY

기묘한 출근길

'어글리 뷰티'라는 생경한 트렌드가 강세다. 유행이라는 명분으로 일상에 침투한 '기괴한' 아이템을 착용한 에디터들의 출근길에 생긴 일


발라클라바가 불러온 나비효과
출근 준비로 여념 없던 어느 날 아침,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에 귀를 의심했다. 혹독한 한파가 10월부터 몰려온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평소 추위라면 끔찍이도 싫어하는 내게 한파 예보는 청천벽력이었다. 문득 지난겨울의 악몽이 떠올랐다. 배수관 동파로 인한 보수 작업은 기본, 빙판길에 미끄러져 며칠간 복대 신세를 진 나날들…. 앞당겨진 올해 겨울은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몇 가지 ‘방한’용 아이템을 구매 리스트로 떠올려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 패딩? 어그 부츠? 그중 눈에 들어온 게 ‘발라클라바’.

캘빈 클라인을 필두로 구찌, 리처드 퀸 등 이번 시즌 런웨이를 장악한, 괴상하지만 따뜻할 것 같은 그것! 발라클라바의 한국어 표기는 ‘안면모(顔面帽)’. 말 그대로 눈만 빼꼼히 내놓은 채 얼굴 전체를 덮을 수 있어 뛰어난 방한 효과를 자랑한다. 주로 혹한기 훈련을 준비하는 군인이나 겨울 아웃도어 스포츠에 사용된다고. 추위를 막아줄 확실한 방패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실제로 일상에서 착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은행 강도를 연상시키는 범상치 않은 디자인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가뜩이나 콤플렉스인 작은 눈과 두툼한 입술이 두드러져 보이면 어떡하나. 누가 봐도 ‘관종’으로 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추위 앞에 장사 없다. 백 번, 아니 천 번 맞는 말이다. 하루아침에 급격히 추워진 10월의 어느 날, 장바구니에 발라클라바를 담고 말았다. 며칠 뒤 출근길, 크게 심호흡한 뒤 발라클라바를 뒤집어썼다. 내가 선택한 건 다른 디자인에 비해 비교적 무난한 네이비 색상의 발라클라바였다. 눈과 코가 뚫린 디자인은 자칫 복면강도로 오해받기 충분하기에 캘빈 클라인 컬렉션을 참고해 눈만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택했건만 튀긴 튀었다.

착용 소감은? 생각보다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얼굴을 너무 타이트하게 조여 꼭 고탄력 스타킹을 뒤집어쓴 느낌이었지만 견딜 만했다. 집을 나선 지 3분도 지나지 않아 몸 전체에 열이 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토록 뛰어난 발열 효과라니! 집에서 역까지는 비교적 사람이 많지 않아 걸어다닐 만했다. 막상 지하철 플랫폼으로 발을 내디디려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게 집중될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 한시라도 빨리 사람 많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귀와 입이 막혀 있으니 음악을 듣거나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며 태연한 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참고로 발라클라바를 착용하면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게 콩나물시루보다 빽빽한 인파로 가득한 아침 지하철에 몸을 맡긴 지 10분째, 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목적지까지 20분은 더 남았지만, 결국 숨 막히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하차했다. 비록 출근길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방한 효과만큼은 뛰어나다는 사실!

겨울 캠핑이나 산행,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키 아이템이 될 것이다. 특히 이번 시즌 또 다른 빅 트렌드인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아노락 점퍼나 패딩과 매치하면 근사한 윈터 스포츠 룩을 완성할 수 있다. 겨울철 건조한 날씨로부터 피부를 보호해 주기도 한다. 남과 차별화를 두고 싶다면 메탈릭한 소재나 화려한 패턴의 발라클라바를 선택하는 것도 추천한다(참고로 리한나는 올해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눈과 입만 드러낸 디자인에 과감한 오버사이즈 이어링을 레이어드했다). 사실 당신이 원한다면 발라클라바를 쓰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물론 동반되는 여러 가지 땀나는 상황 역시 당신의 몫이다. 패션에 정답이란 없으니까. 선택은 자유다. 이번 시즌, 강력한 파워 트렌드 발라클라바는 내게서 멀어지며 옷장 속에 고이 잠들었지만, 며칠 뒤 엄마의 등산 ‘최애템’으로 등극했다는 후문.




패딩의 완결판
고백하자면 나는 ‘패딩 기피자’다. 개인적 취향에서 패딩 점퍼는 기능성 스포츠 의류로 1년에 한 번, ‘스키장 가는 날’에 입는 특수복과 같다. ‘서울 체감온도 영하 43℃’ ‘30년 만의 강추위, 100년 만의 폭설’ 등 매년 등장하는 ‘기록 경신형’ 기상 이변 뉴스에도 시큰둥할 뿐, 나와 패딩은 먼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날씨 탓하며 스타일을 포기하기엔 나름 엄격한 타협점이 있었고, 그 마지노선은 ‘패딩 점퍼’를 넘지 못했다. 무거워진 오래된 무통을 어깨에 지고 다닐망정 패딩을 입고 외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겨울,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패딩을 꺼내 입고 출근하는 자신과 마주하고 말았다. 발단은 이랬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다섯 번의 동결을 겪으며 생애 가장 추운 최악의 겨울을 보냈다. 마감 기간과 맞물리면 호텔부터 친구의 집까지 전전긍긍했다. 어떤 날에는 늦은 밤에 귀가해 10년 묵은 오리털 패딩 점퍼를 침낭으로 삼고, 전기난로에 의지한 채 잠을 청했다. 그렇게 서서히 패딩과 친해진 것이다. 심지어 이왕이면 매서운 한파를 막아줄, 발목까지 오는 길이의 ‘진부하지 않은’ 롱 패딩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간지나는 패딩’ 물색이 시작됐다.
얼마 전 이 기괴하고 신박한 몽클레르 패딩을 발견한 순간, 지난겨울이 떠올랐다. ‘과연 이 옷을 입고 거동이 가능할까?’ ‘길을 걸어다닐 수는 있을까’ 생각이 드는 애벌레를 닮은 패딩 코트. 사진 속의 파격적인 비주얼을 보고 현실보다 런웨이를 위한 아이템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사진 아래 ‘10월 론칭 예정’이라는 문장을 발견하고는 ‘이걸 입고 걸어다닌다?’는 생각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패션계 ‘어글리 뷰티 전성시대’에 익숙할 때도 됐건만 또 다른 종류의 생경한 감정이 생겼다. 직접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국내에 들어오는지 수소문했고, 3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홍보용 샘플을 운명처럼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었다.

구조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코트는 몽클레르가 8명의 크리에이터와 진행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가장 최근에 공개된 ‘1 몽클레르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 컬렉션이다. 이 컬렉션은 전반적으로 패딩 드레스 위에 케이프 코트를 입는 식으로 구성된다. 케이프 코트는 지퍼를 잠그면 통으로 이어진 모습이 영락없이 침낭이다. 사무실 의자에 걸쳐놓은 패딩을 보고 옆자리의 선배는 “야외 촬영 가? 침낭이야?”라고 물었다. 캠핑을 즐기는 선배는 가격이 얼마인지, 언제 출시인지 등 사뭇 진지한 코멘트를 날렸다. 침낭처럼 팔을 안으로 넣고 지퍼를 채워보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평균 신장인 키 162cm의 에디터에게 길이가 2m인 패딩은 파격적이고 버거웠다. 의자 위에 올라서야 겨우 바닥에 끌리지 않으니 말 다했지. 택시를 타자니 패딩 앞자락을 움켜쥐느라 가방과 스마트폰을 쥘 손이 모자랐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택시에 구겨져 들어가는 장면처럼 일행들은 패딩과 한 몸이 된 나를 택시 안으로 구겨넣었다.

코믹했던 첫인상에 비해 초경량 소재의 가벼움과 바람이 절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스트링 마감, 우수한 보온성에서 이 디자인을 수용할 만한 설득력을 찾았다. 어깨 아래로는 팔의 움직임이 자유로웠고 걷는 걸 제외하면 행동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들러리 없는 웨딩드레스처럼 바닥을 쓸고 다니는 패딩 길이만 수선이 가능하다면 점점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어차피 비슷한 가격대의 명품 패딩을 구매할 계획이라면 피에르파올로의 쿠튀르적 디자인이라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였다. 그의 로맨틱한 컬러 팔레트도 한몫한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지하철에서 메종 마르지엘라의 거대한 ‘이불 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자주 목격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엽고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분명한 건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는 것. 10 꼬르소 꼬모 서울에 입고됐다는 소식에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

CREDIT

에디터 이건희, 이재희
사진 GETTYIMAGEKOREA, IMAXTREE.COM
디자인 이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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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본지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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