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스크 댄서의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스피크이지 바 '미스터 원더러스트’.
“이 호텔을 찾는 고객의 대부분은 창의적인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은 훨씬 여유로운 걸 원해요.” 부동산 개발사 라이트스톤의 대표 미첼 호치버그는 가림막이라곤 하나 없는 혁신적인 형태의 미팅 룸을 선보이며 말했다. 노장임에도 멀끔한 수트에 발렌시아가 스니커즈를 매치할 줄 아는 그의 말처럼 지난해 4월에 오픈한 ‘목시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Moxy Downtown Los Angeles)’는 기존 호텔 문법과는 완전 딴판이다. 빨간 모터사이클부터 <인디아나 존스> 핀볼 머신, 사막방울뱀이 새겨진 카펫까지, 로비 한복판에서부터 여느 펑키한 아메리칸 펍에서나 목도할 법한 광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키치’의 대명사로 알려진 목시 호텔이라지만 무언가 달라도 단단히 달랐다. 영화 <매드 맥스> 속의 거친 사막 한가운데에 불시착한 듯한 풍경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면 데님 세트업을 걸친 직원이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멜로즈 애버뉴(Melrose Avenue)를 활보할 법한 자유로운 영혼이 호텔리어라니!
한 건물에 두 개의 호텔이 입주해 있는 독특한 듀얼 호텔 구조. 34층에 자리한 라 로 라 루프톱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울의 중심, 인사동과 명동을 포함해 전 세계에 150개 지점을 둔 메리어트 계열의 목시 호텔이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상륙했다. 독특한 점은 같은 계열의 ‘AC 호텔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AC Hotel Downtown Los Angeles)’와 한 건물을 공유하는 듀얼 호텔 구조라는 사실.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기질은 판이한 쌍둥이처럼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내는 두 호텔은 모두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야부 푸셀버그(Yabu Pushelberg)의 손을 거쳤다. 모든 것이 일어나는 도시, 그중에서도 그래미 어워즈와 LA 레이커스의 홈경기 등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벤트가 끊이지 않는 ‘크립토닷컴 아레나(Crypto.com Arena)’를 목전에 둔 이곳은 지금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역동적이다. 도시를 찾는 젊은 타깃을 위해 합리적 가격대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상회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호텔, 이토록 까다로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야부 푸셀버그는 지극히 미국적인 무기를 꺼내 들었다.
‘죄인과 성인’이라는 이름답게 19세기 성당을 모티프로 꾸민 나이트클럽 '시너스 이 산토스’.
야자수와 황홀한 석양, 광활한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힌트를 얻은 것. 복도를 가로지르는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도로 루트 66을 지나 객실로 들어서면 도시의 탁 트인 파노라마 뷰가 펼쳐진다. 집시끼리만 알아본다는 호보 사인과 앤티크 다이얼 전화기 등 유니버설 스튜디오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Do Not Disturb’ 대신 ‘Hit the Road’ 팻말을 걸어둔 이들의 발칙한 위트를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커다란 옷장 대신 침대 아래에 수납공간을 마련하고, 긴 드레스를 걸 수 있도록 파이프의 곡선을 영민하게 활용하는 등 기능적 요소까지 놓치지 않은 점도 대견했다. 이윽고 해 질 녘엔 벽면 타일이 이글대는 태양을 반사하며 온 방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노을에 온몸을 내던진 카우 걸이었다. 영화처럼 정교하게
짜인 세계관을 이해하는 고객이라면 베벌리힐스의 5성급 호텔이 아닌, 목시를 택할 것이라는 미첼 호치버그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할리우드의 본고장에서 말이다!
거친 서부극이 떠오르는 목시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로비.
거센 모래바람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 건물의 또 다른 비기, ‘레벨 8(Level 8)’을 탐험하러 나섰다. 무려 8개의 퓨전 레스토랑과 바, 나이트클럽이 미로처럼 얽힌 곳이라니, 멜팅 포트다운 발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부동산 개발사와 함께 8개 공간을 기획한 주인공이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 등지에서 이색적인 나이트라이프를 전개해 온 쌍둥이 형제 마크와 조니라는 사실. 두 사람의 실루엣은 한 건물에 나란히 둥지를 튼 두 호텔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8층에 도착해 헤밍웨이가 드나들었을 법한 도서관의 책장을 더듬어 입구를 찾아내면 마침내 스피크이지 바 ‘미스터 원더러스트(Mr. Wanderlust)’가 모습을 드러낸다.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칵테일을 홀짝이다 이내 출출해지면 또 다른 문을 찾아 나서는 것이 레벨 8의 묘미. 한쪽 문은 프랑스 데판야키 다이닝 ‘메종 카사이(Maison Kasai)’로, 다른 한쪽은 퓨전 일식 레스토랑 ‘러키 미주(Lucky Mizu)’로 통한다. 눈앞에서 장작불에 두툼한 립을 구워주는 ‘케 바르바로(Que´ Ba´rbaro)’ 역시 놓쳐서는 안 될 코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고요한 상념에 빠지기 좋은 AC 호텔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의 ‘AC 라이브러리’.
레벨 8의 백미, 나이트클럽 ‘시너스 이 산토스(Sinners y Santos)’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죄인과 성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19세기 성당을 형상화한 입구로 들어서면 해골 더미로 뒤덮인 중문이 나타난다. 카타콤을 연상케 하는 섬뜩한 광경도 잠시, 클럽으로 들어서면 술과 흥겨운 레게톤에 몸을 맡긴 이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이윽고 밤이 무르익을 무렵, 바 위에서는 계시가 내려오듯 프로레슬링 링이 천천히 하강했다. 전설적인 멕시코 프로레슬링 선수 엘 산토가 링 위에 장렬히 쓰러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강렬한 불 쇼와 함께 즐기는 ‘메종 카사이’의 프랑스 데판야키 다이닝.
취기와 열기가 뒤섞인 몸을 이끌고 AC 호텔 다운타운 로스앤젤레스 룸으로 들어서자 고요함이 온몸을 감쌌다. 마침내 강 같은 평화! 목시가 여행의 불씨를 지피는 폭죽이라면, 이곳은 그간의 여운과 함께 고요히 타오르는 촛불이다. 따뜻한 벽난로부터 우아한 책장까지, 랄프 로렌의 저택을 옮겨놓은 듯한 ‘AC 라이브러리(AC Library)’만큼 지난 여정을 돌아보기에 적절한 곳은 없을 테니 말이다. 저녁에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라 로 라 루프톱(La Lo La Rooftop)’에 올랐다. <라라랜드> 오프닝을 오색찬란하게 장식했던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의 끄트머리를 헤아리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지난해 100주년을 맞은 할리우드 사인과 낮에 본 제프 쿤스 작품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떠올리며 미국적인 것에 대해 생각한다. 드높은 볼디 산은 짙게 내려앉은 어둠 뒤로 자취를 감췄고, 도시는 이내 불빛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